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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빨래 대신 어머님과 함께 떠난 영화관 나들이 [산복빨래방] EP 10.
작성일 2022-08-15 조회수 353
빨래 대신 어머님과 함께 떠난 영화관 나들이 [산복빨래방] EP 10.

2022-08-15 353


 

안녕하세요, 산복빨래방입니다.
여러분은 영화를 자주 보시나요? 가족, 연인, 친구와 함께 영화관을 찾아 팝콘을 먹으며 최신 영화를 본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지난 2년 동안은 영화관에 가기 어려웠죠.



산복도로에 사는 어머님·아버님에게 영화관은 그 이전부터 찾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심지어 젊은 시절, 범일동 보림극장에 간 게 마지막 영화 관람인 분도 계셨어요. 무려 수십 년 전의 일입니다.
영화 같은 삶을 살아온 어머님들과 같이 영화를 보고 싶었습니다.
마을 공터에서 스크린에 옛날 영화를 띄우는 게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멀티플렉스에서 제대로 된 영화로 말이죠.











전성기 시절 공연장으로도 각광을 받던 보림극장 모습. 부산일보DB





■ 영화의 추억



“어머님, 언제 마지막으로 영화 보셨어요?”



“나? 까마득해서 기억도 안 나. 젊었을 때 극장 몇 번 가본 게 다지, 뭐”



어머님들은 영화를 본 지 한참 됐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문득 빨래방에 오는 어머님, 아버님마다 영화를 언제 봤는지 물었습니다.
살가운 자식들 등쌀에 못 이기는 척 영화관을 다녀온 분도 계시긴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수년 전 기억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심지어 40~50년 전 지금은 사라진 옛 보림극장에서 본 영화가 끝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고무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워낙 많았으니까. 이 사람들이 퇴근한 뒤나 주말에는 놀 게 없는 거야. 그러면 다들 범일동에 있는 극장으로 갔지. 돈을 조금 내고 극장 안에 들어가면, 안 나오고 온종일 볼 수 있었으니까. 하긴 그때도 일하고 살림하느라 극장 몇 번 가보지도 못했지”.



빨래방 식구들은 ‘어르신들께 영화를 보여드리자’며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오랫동안 영화를 보지 못한 어머님들을 빵빵한 3D 서라운드 사운드와 대형 스크린이 있는 영화관에 모시고 싶었습니다.
영화관을 수소문한 결과, 평소 산복빨래방 영상과 기사를 관심 있게 지켜본 롯데시네마와 연이 닿았습니다.
롯데시네마 측은 ‘정말 좋은 취지’라며 기꺼이 영화관을 제공해주기로 했습니다.
“영화는 역시 롯데시네마죠!”













'산복빨래방' 호천마을 어르신들이 1일 오전 부산 중구 롯데백화점 광복점 롯데시네마에서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이재찬 기자 chan@





■ 영화관 나들이



지난 1일 오전 11시 부산 중구 롯데백화점 광복점 8층 롯데시네마. 평일 오전이었지만 닷새 전 개봉한 최신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을 보려는 관객들로 북적였습니다.
영화관에 앞치마를 두른 산복빨래방 직원들이 모였습니다.
영화관과 호천마을은 5km가 넘게 떨어져 있지만, 다행히 호천마을을 지나는 유일한 버스인 87번 버스를 타면 한 번에 갈 수 있습니다.
참, 어머님들이 영화를 보는 동안 즐겁게 탄성을 지를 수 있도록 한 관을 통째로 빌렸습니다.












지난 1일 부산 중구 롯데백화점 광복점 8층에서 호천마을 주민 40여 명이 영화 관람을 위해 기다리고 있다





사전에 빨래방에서 신청받은 호천마을 주민 40여 명이 차례대로 영화관에 입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생 2학년인 최연소 손님부터 70세가 넘은 어르신까지 주민 나이대는 무척 다양했습니다.
어르신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렇게 멀리 나온 건 정말 오랜만”이라며 “동네 친구들과 다 같이 밖에 나오니 나들이 온 기분이 난다”며 들떴습니다.












주민들이 잠시라도 추억에 잠길 수 있도록 옛 극장표를 본따 산복빨래방 입장권을 만들었습니다



첫 산복 영화관 관객들에게 저희가 정성껏 만든 입장권도 드렸습니다.
실제 옛 보림극장에서 사용했던 표와 비슷하게 보이도록 직접 만들었습니다.
실제 입장권으로 사용한 건 아니지만, 어머님·아버님들이 옛 추억을 생생히 떠올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준비했습니다.












1일 부산 중구 롯데백화점 광복점 8층 롯데시네마에서 호천마을 주민 40여 명이 '한산: 용의 출현'을 관람하고 있다.
이번 행사는 <부산일보> 기자와 PD가 직접 운영하는 ‘산복빨래방’과 롯데시네마 측이 협력해 마련됐다.




2시간 넘게 영화를 보는 동안 주민들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간혹 큰 소리에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내 빵빵한 소리를 맘껏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면 어떡하느냐”는 어머님의 걱정에 “관을 통째로 빌렸으니 마음껏 손뼉 치거나 소리 질러도 된다”고 당당히 답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통쾌한 장면이 나올 때면 어머님들은 마음껏 환호와 박수를 보냈습니다.












'산복빨래방' 호천마을 어르신들이 1일 오전 부산 중구 롯데백화점 광복점 롯데시네마에서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이재찬 기자 chan@





■ 범일동 극장 거리



1940~1950년대 부산 동구 범일동에는 삼일극장, 보림극장, 삼성극장이 잇따라 문을 열었습니다.
이후 1960년대 들어서 부산 신발 공장이 호황을 맞자 이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즐겨 찾았다고 합니다.
당시 범일동은 국제고무, 삼화고무 등 신발 공장이 밀집해있어 근처 산복도로에 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1957년 개장한 제일극장 전경. 출처: 부산박물관



이중 보림극장 앞 ‘교통부'라 불리는 사거리는 부산의 ‘핫플레이스’였습니다.
예전 한국전쟁으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됐을 때 교통부 건물이 근처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렇게 불렸습니다.
온종일 신발 공장에서 일에 시달린 젊은 사람들이 퇴근 후나 주말에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이 적은 돈으로 고된 하루를 잊고 즐기기 위해 가는 대표적인 놀이 장소가 바로 이 극장이었습니다.
현덕순 어머님은 “남편이랑 처음 만날 때도 보림극장에 간 적 있다”며 “쉬는 날이면 부산 각지에서 친구, 연인과 함께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보림극장 전경. 출처: 부산영화체험박물관



수많은 노동자의 휴식처였던 극장은 1990년대 이후 차차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신발 공장이 사라지면서 극장을 찾는 발길도 서서히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1995년 보림극장을 시작으로 2011년에는 삼성극장까지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극장이 있었던 곳에 그 흔적만 어렴풋이 남아있습니다.




여전히 산복도로 마을 주민에게는 발 디딜 틈 없었던 극장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합니다.
빨래방에 오시는 어머님·아버님 모두 힘들었던 지난날을 회상하면서도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보는 게 참 재밌었지”라 꼭 덧붙였으니까요. 하지만 가족을 위해 지난한 삶을 버텨온 그들에게 영화는 곧 사치였습니다.
기반 시설이 열악한 산복도로에는 영화관을 찾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죠. 이번에 본 건 영화 한 편이지만, 문화생활에 대한 목마름을 느꼈을 어머님·아버님들이 추억에 흠뻑 젖었길 바랍니다.


[2022-08-09 부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