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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칼럼]AI라는 이름의 드래곤 길들이기(1/2) | ||
| 작성일 | 2026-10-06 | 조회수 | 10 |
[칼럼]AI라는 이름의 드래곤 길들이기(1/2)
2026-10-06 10
이미지: 작자 미상, 《용과 잉어(Dragon and Carp)》, 19세기 후반, 조선시대. 종이에 먹과 채색.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소장. Public Domain.
AI라는 이름의 드래곤 길들이기(1/2)
AI 시대의 인간다움: 길들이기, 절제, 그리고 비워 두는 것의 의미
Ted Shin | 관점 에세이
Ted Shin (한국이름 신진섭)은 미국 Metropolitan State University of Denver(MSU Denver)의 College of Aerospace, Computing, Engineering, and Design 학장이자 산업디자인 교수이다. 산업디자이너이자 교육자로서, 과거 한국 삼성전자에서 제품 디자이너로 근무하며 삼성의 휴대전화를 포함한 다양한 첨단 제품을 디자인했다. 주요 관심 분야는 인간중심디자인, 디자인 교육, 신기술, 그리고 인공지능과 인간 학습의 변화하는 관계이다. 한국의 영남대학교와 미국 University of Illinois Urbana-Champaign에서 디자인 학위를 받았으며, 2001년부터 산업디자인을 여러 대학에서 가르쳐 왔고 현재의 대학에서 학장으로 재직중이다.
“나는 어떤 지능을 내 곁에서 길들이고 있는가? 그리고 그 관계는 다시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길들이고 있는가?”
모두가 인공지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어떻게 프롬프트를 작성할 것인가? 교실과 일터에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 AI가 만들어 낸 결과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리고 사람이 스스로 해야 할 사고를 AI가 대신해 버리지 않도록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질문들은 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점점 이 질문들 밑에 깔린 한 가지 전제가 머지않아 낡은 것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로 인공지능을 그저 또 하나의 도구로 보는 전제다.
어쩌면 이제 우리는 다른 질문을 해야 한다. “우리의 AI를 어떻게 길들일 것인가?”
여기서 말하는 “훈련”은 파운데이션 모델을 만들거나 파인튜닝하는 기술적 의미의 훈련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일을 직접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훨씬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다. 우리는 AI와 지속되는 관계를 어떻게 의도적으로 형성해 갈 것인가?
AI가 점점 더 개인화되면서, 우리의 목표와 선호, 프로젝트, 소통 방식, 과거의 맥락, 일하는 습관 같은 정보를 지속적으로 반영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AI를 수정하고, 경계를 정하고, 무엇이 중요한지 알려 주고, 언제 도움을 받고 싶은지, 언제는 오히려 도전받고 싶은지를 가르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질문은 더 이상 단순히 “이 기계에서 어떻게 좋은 답을 얻을까?”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이렇게 바뀔지 모른다. “나는 어떤 지능을 내 곁에서 길들이고 있는가? 그리고 그 관계는 다시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길들이고 있는가?”
나는 두 번째 질문이 결국 더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불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인공지능을 인류가 불을 발견했거나, 어쩌면 화약을 발견했을 때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왔다. 또 그렇게 접근을 해야 하는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엄청난 힘을 지닌 무언가를 발견했지만 그 의미를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상상해 보자. 질문은 자연스럽다. 이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를 도울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를 해칠 수 있는가?
오늘날 AI를 둘러싼 많은 대화는 여전히 이 비유에 잘 들어맞는다.
그러나 불에는 비유로서 결정적인 한계가 하나 있다.
불은 당신을 학습하지 않는다.
망치는 어제 당신이 어떻게 사용했는지 기억하지 않는다. 화약은 당신의 가치관에 따라 행동을 바꾸지 않는다. 계산기는 수년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람마다 서로 다른 존재가 되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개인화된 인공지능은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어쩌면 우리는 불을 발견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금방 태어난 AI라는 이름의 아기 드래곤을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기 드래곤은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지만, 우리는 단지 사용법을 익히는 것으로 끝낼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길들여야 한다.
드래곤이 자라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 간다. 어떤 행동은 북돋우고 어떤 행동은 막는다. 경계를 가르친다. 우리는 드래곤의 성향을 배우고, 드래곤은 우리의 성향을 배운다. 처음에는 비슷한 드래곤을 만난 두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전혀 다른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
물론 이 비유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오늘날의 AI는 반려동물도, 아이도, 신화 속 생명체도 아니다.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AI가 의식을 지녔다거나 인간과 같은 내면 경험을 가진다고 가정할 필요도 없다.
아기 드래곤은 더 정확한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키는 비유다. 적응하는 기술과의 관계는 단지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길들이고 형성해야 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바로 이 기술을 만들고 있는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최근 제시한 주장과 나란히 놓아 볼 때 더욱 흥미로워진다.
이미지: Jakub Pachocki, 「An Alien Mind」, OpenAI, 2026년 9월 6일. 원문 페이지 캡처
“낯선 지성(An Alien Mind)”
2026년 9월, OpenAI의 수석과학자 야쿠브 파호츠키(Jakub Pachocki)는 「An Alien Mind」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의 핵심 관심은 사람들이 AI에게 어떻게 더 좋은 프롬프트를 쓸 것인가가 아니다. 인류가 점점 더 강력해지는 기계 지능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렬(alignment)할 것인가이다.
파호츠키는 현대 AI를 인상적으로 표현한다. AI는 “설계된다기보다 길러진다(grown more than designed).” 대규모 훈련은 엄청나게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어 내고, 연구자들은 그 작동 메커니즘을 실험적으로 조사할 수 있지만 완전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능력이 커질수록 그 능력이 새로운 상황에서 어떻게 일반화될지를 이해하기는 오히려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제기하는 중심 문제는 정렬이다. 파호츠키는 목표 정렬(goal alignment), 즉 시스템이 인간이 의도한 목표를 실제로 추구하는가의 문제와, 더 깊은 가치 정렬(value alignment), 즉 낯설고 충돌하며 때로는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의 높은 수준의 원칙을 적절히 일반화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구분한다. 기계 지능은 인간의 발달과 근본적으로 다른 과정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일반화할 것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파호츠키는 주로 AI 시스템과 인류 전체의 수준에서 정렬을 논한다. 그러나 글의 후반부에서 그는 내가 특히 관심을 갖는 또 하나의 방향을 언급한다. 더욱 강력해지는 개인화 AI의 가능성과, 기계가 현재 인간이 수행하는 많은 일을 맡게 되는 세계에서도 인간의 주체성과 인간 삶의 고유한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문제다.
여기서 평행한 또 하나의 정렬 문제가 생긴다.
파호츠키의 질문: “점점 더 강력해지는 기계 지능을 어떻게 인류의 가치와 정렬할 것인가?”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 “점점 더 개인화되는 지능과의 관계를, 지금의 나뿐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사람과도 정렬되도록 어떻게 길들일 것인가?”
두 질문은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된 단어를 공유한다.
길들이기, 혹은 수양과 배양(cultivation).
그리고 바로 여기서 2천 년이 넘은 철학적 논쟁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다시 중요해진다.
그림: 맹자(왼쪽)와 순자(오른쪽)의 초상. 역사적 초상화 복제 이미지를 합성하여 사용. 원작자 미상. 교육 및 개념적 설명을 위한 이미지.
맹자와 순자: 길들이기의 두 끝
유가 전통을 대표하는 두 철학자 맹자와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두고 유명한 논쟁을 남겼다.
맹자는 흔히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보았다고 요약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덕을 지닌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인간 안에 도덕적 가능성의 시작점이 있다고 보았고, 이를 잘 알려진 “싹”의 비유로 설명했다. 측은함,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 존중과 같은 덕의 시작은 자랄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적절한 환경과 꾸준한 수양이 필요하다. 싹은 아직 완성된 나무가 아니다.
순자는 반대쪽에서 출발하는 듯 보인다. 인간에게는 욕망과 충동이 있으며, 이를 성찰이나 규범 없이 그대로 따라가면 갈등을 낳을 수 있다. 따라서 선은 저절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노력, 배움, 예(禮), 스승, 규범, 그리고 자기 수양을 통해 형성되어야 한다. 순자의 주장을 흔히 “성악설”이라고 번역하지만, 여기서 “악(惡)”을 현대적·종교적 의미의 절대적 악으로 읽는 것은 그의 뜻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다는 점도 학자들은 지적한다.
겉으로 보면 두 사람의 입장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한쪽은 인간에게 선을 향한 가능성이 이미 존재한다고 본다.
다른 한쪽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날것 그대로의 성향을 교육과 규범으로 다듬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이 논쟁을 조금 다르게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맹자는 묻는다. “이미 존재하는 가치 있는 가능성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잘 키울 것인가?”
순자는 묻는다. “성향을 방치하면 무엇이 일어나며, 그것을 바람직하게 형성하려면 어떤 실천이 필요한가?”
학자들도 맹자와 순자가 “본성”이라는 말에 서로 다른 개념을 어느 정도 담고 있었으며, 선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두고 다투었지만 인간이 선한 존재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는 공유했다고 지적한다.
나는 두 사람이 어쩌면 같은 진리의 한 부분에 서로 반대쪽 끝에서 접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잠재력은 중요하다.
환경은 중요하다.
실천은 중요하다.
절제는 중요하다.
어떤 존재가 무엇이 될 수 있는가는, 그것이 어떻게 길러지는가와 분리할 수 없다.
물론 AI에게 인간과 같은 “본성”이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공학적 계산 시스템에 그대로 덧씌우는 범주 오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길들이고 수양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놀라울 만큼 잘 옮겨 온다.
중요한 질문은 인공지능이 본질적으로 선한가 악한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가능성을 키울 것인가? 어떤 성향을 억제할 것인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관계가 만들어지는가?
아기 드래곤이 다시 등장한다.
하지만 드래곤도 기수를 길들이고 있다
여기서 비유는 한층 더 복잡해진다.
“AI를 훈련한다”고 말하면 영향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처럼 들린다.
인간 → AI
그러나 지속적인 상호작용은 좀처럼 한 방향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기술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행동을 바꾸어 왔다. 글쓰기는 기억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시계는 시간과 관계 맺는 방식을 바꾸었다. 검색엔진은 정보를 찾는 방식을 바꾸었다. 스마트폰은 길 찾기, 소통, 주의력, 사회적 행동을 변화시켰다.
AI도 예외일 리 없다.
인간이 AI를 형성한다 → AI가 인간을 형성한다 → 인간이 변한다 → 변한 인간이 다시 AI를 형성한다
나는 이것을 “상호 길들이기”, 혹은 “상호 수양(reciprocal cultivation)”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가능성이 하나 있다. AI가 한 사람을 돕는 능력은 놀라울 만큼 좋아지면서도, 동시에 그 사람 자신을 덜 유능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다.
당신을 완벽하게 아는 개인 비서를 상상해 보자.
당신이 말하기 전에 필요를 예측한다.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 초안을 써 준다. 당신의 선호에 맞춰 결정을 대신 내린다. 당신이 직접 읽었어야 할 모든 것을 요약해 준다. 실수를 예방하고,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길을 선택하고, 답장을 작성하고, 해야 할 일을 기억하고, 논리를 짜고, 증거를 분석하고, 당신이 어떤 선택을 좋아할지까지 예측한다.
개인화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엄청난 성공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 발달의 관점에서 보면 결과는 훨씬 덜 분명하다.
판단을 거의 연습하지 않게 되면 판단력은 어떻게 되는가?
기억할 필요가 없어지면 기억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하나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기도 전에 열 가지 아이디어가 주어지면 창의성은 어떻게 되는가?
불확실성을 견디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늘 불확실성이 제거된다면 성숙함은 어떻게 되는가?
인지적 오프로딩(cognitive offloading)에 관한 연구는 이 문제를 단순한 기술 비관론으로 치부하지 않을 이유를 제공한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외부 도구를 이용해 인지 부담을 줄여 왔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즉각적인 수행을 향상시킬 수 있다. 최근의 메타분석도 기억 과제에서 오프로딩의 실질적 장점을 확인한다. 그러나 외부 지원이 사람이 스스로 연습해야 할 인지 과정을 대체할 경우 학습을 약화시키거나 기술의 퇴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실험 및 종설 연구도 늘고 있다.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외부화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이것은 인지적 오프로딩 자체를 반대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문명 자체가 수많은 인지적 오프로딩 위에 세워져 있다.
다만 인지적 노력을 제거하는 것이 언제나 인간의 상태를 개선하는 것과 같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그림: 마루야마 오쿄(円山応挙, 1733–1795), 《빙도(氷圖, Cracked Ice)》, 2폭 병풍, 에도시대, 18세기. 대영박물관 소장.
저자 역:오쿄의 《빙도》는 비어 있음이 곧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몇 개의 선만으로도 거의 비어 있는 화면에 깊이와 차가움, 공간감, 그리고 생명감을 만들어 낸다.
비움의 가치
이 지점에서 나는 요즘 점점 더 자주 생각하게 되는 개념으로 돌아온다.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가치다.
생산성을 숭배하는 문화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은 거의 무책임하게 들린다.
하지만 잠을 생각해 보자.
생산성을 오직 눈에 보이는 산출물로만 측정한다면 하루 여덟 시간의 수면은 놀라운 비효율처럼 보일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약 3분의 1을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데 쓰는 셈이다.
그렇다고 누구도 생산성을 33퍼센트 높이기 위해 잠을 없애자고 진지하게 제안하지는 않는다.
겉으로는 정지해 보이는 시간이, 실제로는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일 수 있다.
깨어 있는 동안의 사고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2025년에 발표된 체계적 문헌고찰과 메타분석은 37개 연구, 63개 실험을 검토한 결과, 학습 후의 조용한 깨어 있는 휴식(quiet wakeful rest)이 기억의 공고화에 유의미한 도움을 주며 그 효과가 시간이 지나도 측정될 수 있음을 보고했다.
창의성 연구에서도 비슷한 “인큐베이션 효과(incubation effect)”가 발견된다. 문제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이 어떤 조건에서는 이후의 문제 해결을 향상시킨다. 물론 이것은 마법이 아니다. 지루함이나 무활동이 자동으로 창의성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구 결과는 의식적으로 계속 밀어붙이는 것만이 언제나 최선의 해결 방식이라는 가정을 흔든다.
신경과학도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이른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는 여러 종류의 내적 사고 상태에서 활성화되며, 자전적 기억, 자기 관련 사고, 사회적 인지, 의미 처리, 마음의 방황, 그리고 한 주요 종설이 우리의 자기 감각과 연결된 일관된 내적 서사의 구성이라고 설명한 과정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표현 자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겉으로 비어 보이는 시간 안에는 기억의 공고화, 연결, 성찰, 상상, 그리고 의미의 구성이 일어나고 있을 수 있다.
비어 있음은 반드시 공허함을 뜻하지 않는다.
모든 마찰이 좋은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과거를 낭만화할 위험이 있다.
기다린다고 해서 모두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지루함이 늘 창의성을 낳는 것도 아니다.
어렵다고 해서 모든 일이 어려운 채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기술은 셀 수 없이 많은 쓸모없는 마찰을 없애 왔고, 그것은 대체로 좋은 일이다.
행정 서류 하나를 찾느라 세 시간을 허비한다고 사람이 더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지도가 없어서 길을 잃는 것 자체에 인간 발달의 특별한 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정보에 불필요하게 접근하기 어렵다고 해서 학생이 지적으로 더 강해지는 것도 아니다.
AI는 그런 장벽을 적극적으로 없애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선택은 “효율이냐 성찰이냐”가 아니다.
“기술이냐 인간이냐”도 아니다.
더 어려운 질문은 구분하는 능력이다. 어떤 마찰은 쓸모없고, 어떤 마찰은 사람을 성장시키는가?
AI가 없애야 할 어려움은 무엇인가?
AI가 함께 헤쳐 나가도록 도와야 할 어려움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이 직접 겪도록 의도적으로 남겨 두어야 할 어려움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인간 중심 디자인의 문제다.
그리고 언젠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디자인 문제 가운데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지 않은 공간
이미지: 남리 김두량, 「월야산수도」, 종이에 담채, 81.9×49.2㎝, 174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업디자이너인 나는 이 문제를 자꾸 시각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현대 기술 디자인에서 “개선”은 흔히 더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 많은 기능.
더 많은 자동화.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편리함.
더 많은 개인화.
더 많은 답.
더 적은 기다림.
더 적은 마찰.
하지만 구성을 전혀 다르게 이해하는 디자인 전통도 있다.
한국 전통 회화에서는 여백(餘白), 즉 그리지 않고 남겨 둔 공간이 특별한 중요성을 가진다.
여백을 단순히 사용하지 않은 캔버스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한국 회화에 관한 연구는 붓질과 빈 공간을 서로 의존하는 요소로 설명한다. 시각적으로 비어 있는 부분이 실제로 그려진 요소만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 기법 가운데 홍운탁월(烘雲托月)은 달 자체를 그리는 대신 주변의 구름을 그려 달을 드러낸다. 달은 비워 둠으로써 나타난다.
대상은 부분적으로 “없음”을 통해 드러난다.
구성은 작가가 무엇을 그리지 않기로 선택했는가에 의해 완성된다.
이 생각은 인공지능과 점점 더 깊이 연결되어 보인다.
기술적 본능은 묻는다. “AI가 인간 삶의 캔버스에 무엇을 더 채울 수 있는가?”
인간 중심적 접근은 한 가지를 더 물어야 한다. “무엇은 그리지 않은 채로 남겨 두어야 하는가?”
이것은 미학적 향수를 위해 빈 공간을 보존하자는 말이 아니다.
완전히 채워진 공간이 반드시 더 풍부한 공간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캔버스를 가장자리까지 모두 채웠다고 해서, 세심하게 여백을 남긴 작품보다 의미가 더 많은 것은 아니다.
활동으로 완전히 채워진 삶이 반드시 더 많은 삶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답을 공급받는 마음이 반드시 더 많은 이해를 갖는 것도 아니다.
여정이 답의 일부일 수 있다
이 공간을 지켜야 하는 데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다.
인간 문명은 효율적인 해결책만을 찾아 발전한 것이 아니다.
수천 년 동안 우리는 문자 그대로의 어둠과 비유적인 어둠을 바라보며 즉각적인 실용성이 거의 없는 질문을 던져 왔다.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는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죽은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주는 무엇이며 그 안에서 인간의 자리는 어디인가?
종교, 철학, 예술, 문학, 천문학, 그리고 훗날 과학의 상당 부분은 여러 동기에서 출발했다. 그 가운데에는 경이로움, 그리고 답이 즉시 주어지지 않는 질문 곁에 오래 머물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질문에도 거의 즉시 그럴듯한 답을 만들어 내는 기계를 만들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위험은 그 답이 틀릴 수 있다는 것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질문은 너무 빨리 답을 얻는 순간, 질문이 우리에게 줄 수 있었던 무언가를 잃을 수도 있다.
한 젊은 사람이 이렇게 묻는다고 해 보자.
“나는 내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충분히 강력한 AI라면 관심사, 능력, 성격, 노동시장 전망, 재정적 제약, 선호 지역, 과거의 선택, 그리고 수백만 개의 진로 경로를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훌륭한 조언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은 애초에 최적화만을 기다리는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한 사람이 되어 간다는 것은 그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과정의 일부일 수 있다.
무언가를 해 본다. 내가 그것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군가를 만난다. 실패한다. 사랑에 빠진다. 우선순위가 바뀐다. 실망한다.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된다. 아름다움을 만난다. 상실을 겪는다. 생각을 바꾼다. 그리고 또 바꾼다.
어떤 질문은 수년 동안 그 질문을 계속 묻는 과정 속에서 의미를 얻을지도 모른다.
여정은 언제나 답 주변의 비효율이 아니다. 때로는 여정 자체가 답의 일부다.
그림: 존 키츠의 ‘네거티브 케이퍼빌리티(Negative Capability)’. 1817년 12월 22일 서신 인용. 출처: Keats-Shelley House, Rome.
시인 존 키츠(John Keats)는 이와 관련된 인간의 능력을 “네거티브 케이퍼빌리티(negative capability)”라고 불렀다. 불확실성과 신비, 의심 속에 있으면서도 성급하게 확실한 결론으로 도망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다. 이 개념은 인지과학이 아니라 시론에서 나온 것이지만, 기계가 즉시 확신에 찬 답을 생성하는 시대에 놀라울 만큼 현대적으로 들린다.
AI는 우리에게 전례 없는 “답변 능력”을 준다.
그렇다면 인간은 “아직 모르겠다”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더 의식적으로 지켜야 할지도 모른다.
* 이번편에서는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아기 드래곤’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그리고 더 많은 선택과 더 빠른 답이 항상 인간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살펴보았으며, 오히려 이전에서 효과적이지 아니라고 여겨졌던 불확실성, 불완전함, 그리고 비어있음이 오히려 인간의 판단력과 창의성, 성찰을 위해 필요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보았다.
다음2편에서는 그렇다면 ‘잘 길들인 AI’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다뤄볼 예정이다. 특히 언제 인간을 도와야 하고 언제 기다려야 하는지, 그리고 인간과의 다양한 관계를 통해 집단적 경험과 개인적 경험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살펴보면서, AI가 인간의 변화와 성장을 존중하는 개인화란 무엇인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주: 이 글은 관점 에세이다. 맹자와 순자, 여백, 아기 드래곤 등의 비유와 철학적 연결은 현재의 AI 시스템이 인간과 같은 도덕적 본성, 의식, 또는 내면 경험을 가진다는 주장이 아니라, 인간과 AI의 관계를 생각하기 위한 개념적 렌즈로 사용되었다.
번역 주: 이 한국어판은 Ted Shin의 영문 원고 「Raising the Dragon Called AI」을 바탕으로 의미와 논지, 에세이의 리듬을 살려 번역·편집한 것이다. 제목은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표현인 「드래곤 길들이기」를 사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