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뉴스

제목 [중국] 소비행위하의 국가정서 - 1930년대 중국 국산품 운동 재고
작성일 2022-10-25 조회수 536
[중국] 소비행위하의 국가정서 - 1930년대 중국 국산품 운동 재고

2022-10-25 536


소비행위하의 국가정서 - 1930년대 중국 국산품 운동 재고

 

 


 

 

저자: 탄위수 谭玉秀, 판리쥔 范立君 (동북사범대학 역사문화대학 교수, 지린사범대학 역사문화대학 교수)


1930년대 중국의 국산품 운동은 역사학, 경제학, 광고학, 언론매체와 문학 등 여러 분야의 관심 대상이었으며, 거시적 관점을 가지고 국산품 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를 전개했고, 서로 다른 지역을 고찰점으로 그 변화를 분석하였으며, 광고, 여성 화장품, 국산품 상표 등 작은 부분을 통해 국산품 운동의 추진 과정의 특징과 함축된 애국주의 정신 등을 분석했다. 이 글은 소비행위의 시작으로 국산품 운동의 역사적 요인과 시민의 소비 행동을 변화시키는 조치, 국민의 소비 행위의 변화 등의 측면으로부터 1930년대의 국산품 운동을 다시금 살펴보고, 전모를 그리고 참여자의 국가적 조정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한다.

 

 

여러 가지 역사적 요인이 만들어낸 국산품 운동


1930년대 중국은 전쟁과 기근의 침입과 내부 정세의 불안, 세계 경제 위기의 충격으로 중국 경제가 하강하는 모습을 보였다. 서구 각국은 자신들의 경제 공황에 대응해 급히 동양으로 눈을 돌렸고, 근대적 불평등 조약 체계의 특권을 빌어 대량의 외국 상품이 시장에 넘쳐나 국산품의 판매 부진을 야기했다. 원래 불안정했던 민족 산업과 상업은 파산과 도산에 직면했고, 동남 해안 지역이 경제 발달 지역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918 사변 이후 민족의 위기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 산업 구국 사조의 추진, 정치 안정의 절박함 등의 요인이 상호 작용하여 1930년대 국산품 운동이 일어났다. 근대 중국 국산품 공업의 변천은 태동기, 완전 발전기, 쇠퇴기, 추진기, 신생활기 등의 5단계를 거쳤다 (왕성요王性尧 : <1912년 이래 우리나라 국산품 공업>, <민국경제사 : 은행주간보 30주년 기념호>, 1948년, 249쪽). 실제로 중국의 근대 공업화는 양무운동에서 시작되었는데, 초기에는 군용 공업의 설립에 중점을 두었고, 이후 민생과 관련된 방적, 밀가루, 실크, 석유제조, 제지 등의 민간기업이 잇달아 설립되어 중국 근대 국산공업이 규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국 근대 국산품 산업은 외부적으로는 각종 불평등 조약에 구속되고 내부적으로는 정치 사회적 혼란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는데 여러 저항에 부딪혔다. 설립 초기에는 방적과 밀가루 산업의 약간의 성과를 제외한 다른 산업의 발전은 매우 느렸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유럽 국가들은 전쟁으로 바빠, 서로 함께 할 여유가 없어, 중국의 민족 공업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특히 1919년 5·4운동으로 촉발된 일본 제품 불매운동으로 국산품의 황금기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서양 각국의 공산품이 다시 등장하면서 국산품 산업은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1930년이 되어 민족의 위기를 구하고, 민족 공업을 어려움 속에서 구하기 위한 국산품 운동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중국의 수출입 무역은 발전이 완만했으며, 장기간 수입이 초과한 상태였다. 1912년부터 1946년까지 35년 동안 1941년을 제외한 나머지 34년은 모두 수입이 초과하였다. 무역 적자가 국가 경제의 명맥을 손상시킴으로 어떻게 하면 불균형한 수출입 무역의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각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당시 두 가지 선택이 있었는데, 하나는 근본적인 원인을 고쳐서 산업을 활성화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고치는 방법으로 국산품 운동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두가지 방법이 같이 발전하고 서로를 보완할 수 있다면 결과는 분명히 뚜렷하겠지만, 1920~30년대 국내외 정세의 불안은 실업 구국과 국산품 운동의 추진에 영향을 미쳤다. 일상 생활용품에 대한 국민의 수요는 국산품으로 만족시키기는 어려웠고, 일정한 정도에서 서양 제품의 유입을 불러 일으켜, “국산품 제창으로 국산품의 수준을 끌어 올리는 것으로 전국의 수요에 부응하는 것에 충분하고 국민이 국산품을 사용하게 하는 장기적인 습관을 기를 수 있다… 이런 운동은 실제로 위험을 무릅쓰고 죽음에서 구하는 것으로 중화민족을 구하는 가장 위대한 작업이다."(덕정德征:국산화 운동), 《주간평론, 상해민국일보 별간》 1929년 3권 23호, 1페이지). 시장에 외국 제품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도시 사람들의 소비 취향을 변화시키고, 국산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장기적인 소비 트렌드를 형성하여, 소비가 생산을 주도하고 중국 민족 공상업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나아가 국제 시장에 진출하여 국가를 강화하고 부를 실현하는 것은 당시 각계각층이 함께 극복해야 하는 난제이자 국가 정서의 뚜렷한 현상이었다.

 

 

 

시민의 소비 행위를 변화시키는 다원적 조치


국산품 운동은 경제, 정치, 사회 등 많은 분야에 관련되어 있으며, 정치인, 상공단체, 언론 매체, 지식인 등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국산품을 적극적으로 제창하고, 다양한 조치를 취하여 국산품을 홍보, 판매하여 국민들이 국산품을 기꺼이 구매할 수 있도록 하였고, 하나의 국산화 경영 모델로 생산, 판매하도록 하여 외국 제품을 좋아하는 소비 행위를 변화시켜 민족 경제를 활성화시켰다.

근대 이후 서구 여러 나라는 많은 양의 외국 제품을 중국 시장에 판매했는데, 일부 외국 제품은 품질이 좋고 가격이 저렴하여 일반 사람들은 가계 지출과 상품의 실용성에서 출발하여 자연스럽게 외국 제품을 구매하는 경향이 생겼다. 동시에 세관 관세 보호가 부족하고, 국내 여러 지역의 세금 착취로 인해 민족 산업은 자연스럽게 정체되었다. 이에 따라 각 지역에서는 이런 국면을 변화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는데, 불평등조약 금지, 자율관세 실현, 국산품 전시회 개최, 민족 상업 공업의 활성화, 국산품 선정의 중요성과 서양 제품 사용의 부정적 영향 홍보, 국산품 판매 및 서양 제품 판매 금지 등이 있다. 일례로 1933년 후난(湖南)성 교육청 계장이었던 슝마오성(熊茂生)은 적극성과 소극성이 공존하는 국산품 방법을 제창했다. “각국의 대중국 불평등조약을 일률적으로 철폐한 뒤 관세보호정책을 실현해 서양 제품의 수입을 저지하고, 동시에 광물을 채굴해 공업을 진흥해 제품을 제조하여 서양 제품을 대체하는 것으로 수요에 대응한다"는 적극적인 방법이고, "이권 유출로 인한 경제 파산과 같은 서양 제품을 사용하는데 대한 위험을 의무적으로 민간에 알림으로써 전 국민이 국산품을 경시하는 심리를 서양 제품으로 돌리게 하면 국민들이 국산품을 기쁜 마음으로 이용하게 된다"는 것이 소극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행정력을 이용하여 국산품 운동을 추진했는데, 즉 국산품으로 대체할 수 없는 소수의 외국 제품(예: 각종 화학약품)을 제외하고, 기타 국산품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경우, 상점은 절대 구매할 수 없고, 내국인은 절대 사용할 수 없으며, 위반자는 누진 벌금을 부과한다(슝마오성(熊茂生):<국산품 운동 제창과 국산품 제창>, <협균교보> 1933년 22호, 4~5페이지).

당시 정부, 사회단체, 개인은 국산품을 제창하는 표면적인 노력에 그치지 않고, 국산품의 품질을 향상시키고 국산품의 품질과 평판을 만들어 국민들이 국산품을 기쁘게 소비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특히 중화총상회와 전국 각지에 있는 크고 작은 상공회의소는 <국산품진열조직규약>, <상하이 상회 국산품 상가 영업사원 서비스 지침>, <싱가포르 중화총상회 국산품 확대 전시 판매 대회 규약> 등 관련 규정을 공포하여 국산품 운동을 추진하였다. 동시에 상인회는 상인과 민중의 이중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국산품 전문 상점을 설립했다. 당시 상하이는 상하이 상공회의소 국산품 상점, 상하이 국산품 회사, 중국 국산품 회사, 중앙 국산품 대형 시장, 상하이 국산품 저가 상점 등 5대 국산품 상점을 잇달아 설립했다. 그 중 상하이 상공회의소 국산품 상점은 최초의 국산품 상점 중 하나로 개장 당일 판매액이 8,000위안에 달했고, 사람들은 비단, 신발, 양말, 비누, 장샤오취안张小泉 칼 등의 국산품을 적극적으로 구매했다. 나아가 국산품 시장을 규범화 하기 위해, 공상부는 각 성, 시의 총상회에 국산품에 반드시 국산품 문구를 붙이도록 엄격하게 관리했다. 정부와 사회 단체, 국민이 국산품의 생산, 판매, 소비의 효과적인 상호 작용을 위해 힘을 합쳐 국산품을 홍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론의 풍향계이자 지도자인 언론매체도 국산품 권장 운동에 적극 나섰다. 1937년 중국 최초의 관영 방송 주간지인 <방송주간>은 독자와 청중에게 국산품을 알리기 위해 라디오 퀴즈 프로그램을 개설해 국산품 인터뷰를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국민들이 국산품 구매 및 사용의 중요성을 깨닫고 상인들에게 국산품을 판매하도록 권장하고 개별 판매자의 모범을 빌려 시범 효과를 달성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유통의 중요한 한 단계로서 상인의 국산품 운동에 대한 관심은 매우 중요하며, 사람들의 소비 형태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상인들을 동원하여 국산품 공급에 집중하고 국산품 운동을 지지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또한 민국시대 신문관, 잡지사, 출판사 등도 국산품 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국산품 연감》, 《국산품 연간》, 《국산품 운동일보》, 《국산품 주간일보》, 《여성국산물 연간기념특별호》, 《저장성 국산물 진열관 월간》, 《국산품 포럼》, 《국산품 월간(상하이)》, 《국산품 안내》, 《국산품 평론》, 《중화국산품유지회 월간》, 《국산품과 실업》 등의 간행물을 편집 출판하여, 국산품 운동과 관련된 각종 글, 평론, 조례, 통계 보고 등을 게재하였다. 예를 들어, 1930년 <자치自治>는 후난성 사람들의 국산품 권장 운동에서 가족 간의 국산품 운동에 대한 대화를 보도했다 : 가장은 어떻게 자녀들에게 서양 사탕을 먹지 않도록 교육하는가. 이러한 뉴스는 일반인들이 국산품 사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음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당시 신문이 사건 게재 형식으로 여론의 주도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여 국산품 운동을 민심에 깊이 침투시켰음을 보여준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국산품 운동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었고, 효과가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대중의 읽을거리의 홍보와 지도로 큰 힘을 얻어 그 효과가 첨음으로 나타났다. 이 보도 자료는 국산품 운동의 중요성, 국산품의 규범화된 규정과 규칙, 국산품을 활성화하기 위한 각종 기구와 조치 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국산품 장려 조례 개선, 산업 유형 국가 보호 규정, 각종 공업 원료 구매 협동 조합 설립, 산업 연구소 설립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규정과 기관의 제정과 창립은 국산품 운동의 발전에 매우 유익했다. 더 많은 사회 계층이 국산품 운동에 참여하도록 장려하기 위해, 국민 정부는 1933년을 “국산품의 해”로, 1934년을 “여성 국산품의 해”로 정해, 연도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형식으로 민중의 적극성을 이끌었다. 여성들이 국산품 운동의 주역으로 추대되는 이유는 주로 도시 여성들이 외국 상품의 주요 소비층인 것과 공시에 수입 화장품과 의류는 도시 여성들이 열광하는 상품으로 수입 제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외국 제품의 구매를 포기하게 하고, 국산품을 구매하도록 장려하여 국산품 진흥에의 목적을 이룰 수 있게 했다. 1934년을 “여성 국산품의 해”로 제정한 이후, 상하이 사회의 상류층이 거리로 나와 도시 여성들이 솔선수범해 말을 타고 행진하며 국산품 소비의 의미를 알리는 연설을 했다. 또한 국산품 전시회 개최, 국산품 간행물 창간, 학생 구국회, 국산품 운동 촉진회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일반 서민들에게 국산품 소비의 중요성, 국산품 운동과 국민 경제 건설과의 관계를 인식시켜 국산품 운동이 심도 있게 보급될 수 있는데 힘을 더했다. 

 

 

 

가정과 국가 정서 아래 민중의 소비 행위 어려움과 변화.


현대 중국에서 상품의 품질과 가격의 매력, 사회적 지위와 패션 트렌드를 추구하는 시민들의 요구이든 상과 없이 외국 제품은 일상 생활의 필수품이 되었다. 1930년대 국내외의 심각한 상황은 국산품 운동을 일으켜, 애국이라는 명목으로 오랫동안 답습해 온 소비 습관과 행동을 바꾸도록 이끌었으며, 그 과정 중의 도전과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는 불안정한 시국 하의 중국인들의 애국심을 반영하고 있다.

정부와 언론, 지식인 집단의 동원과 선전에 따라 대중은 점차 국산품 구매와 국산품 사용에 대한 중대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는데, 국산품 구매 소비 행위가 한 가정의 일상적 사용의 구현일 뿐만 아니라, 중국 민족 상업, 공업의 흥망성쇠와 연관되며, 국가 경제의 명맥의 향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초기 여론 선전과 정부의 주도적 계획, 다양한 국산품 기관의 설립 및 다양한 사회 집단의 적극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국산품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국산품 운동의 주체인 일반 대중의 소비 습관과 소비 형태의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여성은 가족 구매의 책임을 지며 국산품의 판매와 민족 상공업의 성쇠와 관련이 있다. 특히 도시 패션을 주도하는 여성이나 젊은 여학생들이 사용하는 의류나 화장품은 수입품이 많아 여성들은 수입품을 소비하는 주체가 되었다. 1933년 1월부터 10월까지의 화장품 수입은 140만 위안에 이르렀다 (<여성 국산품 해의 관념>, <복상福湘순간(월 3회 발행)> 1934년 제46호, 11페이지). 1935년 상하이에 수입된 향수 분말, 가짜 장신구, 레이스 장식 등의 수입량만 163만 위안 이상이었다 (<국산품의 해 여성 소비재의 대량 수입>, <행건월간> 1935년 6권 1호, 171쪽). 이는 여성 소비재의 수입액이 비교적 높고 특히 상하이가 가장 두드러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성 국산품의 해>는 각계의 주목을 받았다. 도시 여성은 정치, 경제, 여론 등 여러 요인의 작용으로 국산품 권장을 주력군이 되었다. 예를 들어, 상하이 여성회는 여성의 국산품 구매 의욕을 동원하여, 여성이 국산품 구매하는데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특히 여성 국산품 소비 협동조합을 설립, 곡물, 선물, 화장품과 같은 분야로 나누었고, 모든 가격은 일반 상점보다 저렴하고 구매 절차도 매우 편리했다. 영화배우들도 국산품 운동에 동참해 시범과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의 1세대 영화 황후”로 불리는 영화배우 후디에胡蝶가 직접 국산품을 사러 국산품 상점을 찾았다는 소식을 <링롱玲珑>, <사진화보>에 실었는데, 이러한 스타 효과에 힘입어 더 많은 국민들이 국산품을 지지하도록 유도하여, 대중의 소비 습관과 행동을 변화시켰으며, 특히 여성들이 국산품을 더 많이 선택하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지식인 단체는 국산품 운동의 지지자이자 실천자였다. 예를 들어 1936년 위다푸郁达夫는 <국산품 사용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국산품 소비를 제창하면서, 외국의 출판물과 필수 문구류는 부득이하게 수입품을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기타 식생활과 일용품은 모두 국산품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화민국 시대에 외국 제품을 사용하는 주체는 도시 사회의 중상류층이었고, 이러한 사람들의 소비 형태의 변화는 국산품 운동의 발전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국산품 권장 운동의 외침 속에서 대부분 도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외국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 형태와 습관이 점차 변화하여 의류, 식품 및 운송에 필요한 필수품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외국 제품에서 국산품으로 바뀌었다.

종합하여 말하자면, 1930년대 국산품 운동은 경제적 측면의 민생 이슈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 사회, 가족, 개인 등 다양한 이해관계와 관련이 있었으며, 국민의 소비 습관과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민족 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민족 경제의 흥망성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민족적 위기를 구해야 한다는 애국적인 주장 아래 사람들은 견지와 포기 사이의 갈등 속에서 오랫동안 답습해 온 소비 습관을 점차 바꾸고, 국산품을 더 많이 구입하고 사용하고 있다. 비록 이번 국산품 운동의 궁극적인 효과는 제한적이지만, 민중을 동원하여 민족 공업을 지지하고, 국가를 구하고 민족의 생존을 도모하여 시대의 애국심을 드러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광명일보》(2022年07月04日 14版)

 

 

출처: 차이나슈즈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