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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㉘ 동신화학과 폴리우레탄
작성일 2023-03-19 조회수 642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㉘ 동신화학과 폴리우레탄

2023-03-19 642


신발이바구동신화학과 폴리우레탄

 

신발, 한국 폴리우레탄 기술의 표준이 되다

 

폴리우레탄(polyurethane, PU)은 화학의 탄생물이다. 용도가 광범위하다. 어디어디 쓴다고 하는 것보다 어디어디 안 쓴다고 하는 게 용이할 정도다. 대형 화재가 발생하노라면 공공의 적으로 두들겨 맞기도 한다. 그래도 현대사회 구석구석 없으면 안 되는 게 이 폴리우레탄이다.

말은 좀 어렵다. 폴리우레탄.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국어사전 설명도 어렵고 지식백과 설명은 더 어렵다. 신발과는 어떤 관계? 이럴 때는 굵고 짧게 가야 한다. 그냥 한 문장으로 끝내자. 폴리우레탄이 없으면 신발도 없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한국의 신발은 첨단이었다. 시대를 앞서 나갔다. 신발공장을 처음 세운 1919년부터 세계 시장으로 나아가던 종합무역상사의 1970년대, 그리고 마침내 세계 챔피언으로 등극한 1980년대, 그리고 2000년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발은 늘 첨단이었다. 지난 시절 신발이 첨단이었다는 또 다른 증명이 폴리우레탄이다.

 

왜 그런가. 한국에서 가장 먼저 폴리우레탄을 수입하고 가장 먼저 폴리우레탄을 만든 업종이 신발이었다. 1957. 폴리우레탄 폴 자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화학이란 개념조차도 낯설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신발은 달랐다. 한국의 어떤 신발회사는 상호에 화학을 쓰면서 시대를 앞서 나갔다. 폴리우레탄의 본 고장 독일로 날아가 배우고 익혀서 고국에 씨앗을 퍼뜨렸다.

 

*동신화학이 1957년 독일에서 도입한 폴리우레탄 발포기 펌프 부분. 경기도 시화 금호화성이 보존 중이다. 본사가 서울에 있던 동신화학은 한국에 폴리우레탄 기술과 기계를 최초로 도입한 신발 대기업이다. 

 

동신화학공업주식회사. 한국에 폴리우레탄의 씨앗을 퍼뜨린 기업이다. 서울 수복 직후인 1954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236에서 창업했다. 설립자는 현수덕(19121980). 농구선수 현주엽의 할아버지며 화승그룹의 전신인 동양고무 현수명 회장의 맏형이다. 한국전쟁이 나자 수덕·의창·수명 삼형제는 부산으로 피란 와서 동양고무를 창업했다. 1953년 종전이 되자 서울로 돌아간 현수덕이 1954년 창업한 기업이 동신화학이다. 그런 연고로 동양고무 동자표 고무신 상표를 동신화학도 썼다.

 

동신화학은 고무제품에 주력했다. 오리표란 상표로 한국 다섯 손가락인가 여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신발 대기업이지만 신발만 만들진 않았다. 한국에 화학공장이 거의 없던 1950년대 신발과 타이어, 치약, 플라스틱 등 국민의 일상을 보듬었다. 1956년 타이어를 본격 생산해 한국 최대의 타이어 메이커로 등극했으며 PVC와 플라스틱 생산에 나섰다. 1957년 독일에서 기술과 기계를 수입해 폴리우레탄 공장을 가동, 한국 유일의 고무제품·합성수지 종합 메이커로 우뚝 섰다.

    

동신화학 폴리우레탄의 시발점은 독일 바이엘사였다. 바이엘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폴리우레탄 기술 보유 회사였다. 사업 분야가 다양했다. 바이엘 작물보호제 원료 사업을 시작으로 1955년에는 한국바이엘이 국내에 들어와 있었다. 1956년 동신화학은 바이엘과 폴리우레탄 기술도입 계약을 맺고 직원을 독일 본사로 파견했다. 파견 직원은 임호였다. 서울대 화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니면서 미국계 상사에 적을 둔 임호를 영입해 연수받도록 했다.

 

이때가 195610월이었다. 그때는 여의도 벌판이 공항이었다. KNA의 푸로펠라 비행기를 타고 홍콩으로 가서 구라파행 비행기로 갈아타고 가는데 3일이 걸렸다.

 

임호의 회고다. 임호는 한국에 폴리우레탄을 최초로 도입한 공로자로 기록된다. 임호로 시작한 동신화학의 폴리우레탄 기술은 이후 한국 폴리우레탄 기술의 표준이 되고 비공인 KS가 된다. 임호가 기술 이수를 위해 독일로 날아간 것은 195610. 바이엘 본사가 있는 쾨른에 도착한 임호는 깜짝 놀란다. 2차 세계대전 패망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도시에 바이엘 화학공장만 온전히 남아 있었다.

 

바이엘사가 개발한 폴리우레탄과 새로운 소재는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잠수함, 군함, 탱크 등 전략상 귀중한 것임을 첩보기관이 인지하여 연합군은 이곳을 폭격하지 않고 기술과 기술자를 보존하게 되었다.

 

임호는 바이엘 근처 호텔에 머물면서 연수를 받았다. 펌프 등 기계의 분해와 조립, 세척을 마스터한 뒤 실험기 조작법을 배웠다. 이때 도입한 펌프 기계는 동신화학의 후신이랄 수 있는 경기도 시화 금호화성에서 보존한다. 일본은 한국보다 2년 앞서 1955년 폴리우레탄 기술을 이수하고서 본국의 산업현장에 적용했다. 한국이 먼저 이 기술을 가져왔더라면 한국과 일본의 경제지형 내지는 판도가 달라졌지 않았을까 싶다.

폴리우레탄의 발견은 우연이었다. 1937년 독일 바이엘 박사의 연구실에 있던 물질이 쥐가 건드려 물에 쏟아지면서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이것이 폴리우레탄이었다

 

 

*동신화학 오리표 운동화 광고와 1965년 달력. 동양고무를 창업한 삼형제 중 맏이인 현수덕이 1954년 서울에서 창업한 고무제품·합성수지 종합 메이커였다. 동양고무 동자표 고무신 상표를 같이 썼다.

 

1952년 상품화에 성공했으며 바이엘은 인류의 생활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이 기술을 전 세계에 보급하기로 결정했다. 1955년 아시아 최초로 일본이 도입했으며 1957년 한국 최초로 동신화학이 도입했다.

 

폴리우레탄은 산업 전 분야에서 퍼져나갔다. 진양화학은 1965년 부산에서, 1975년 경기도 용인에서 폴리우레탄 폼(Foam)을 생산했다. 1967년 군산 경성고무가 생산하였고 1976년 동생이 경영하던 김포 한비산업이 경성고무 설비를 인수하여 생산했다. 1968년에는 종합 플라스틱 가공회사 왕관표 삼영화학이 안양에서 생산했다폴리우레탄 중에서도 연질 폼이란 게 있다. 식빵 형태다. 설명하기가 폴리우레탄보다 더 어렵다. 인터넷 검색하면 상세한 설명이 나오니 거기로 미루기로 하고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1990년대까지는 연질 폼의 70% 이상을 신발공장이 썼다. 한국의 신발 생산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던 시기였다. 덕분에 한국 PU 연질 폼 기술은 세계 최고였다. 세계 최고의 연질 폼 기술과 ‘Made in Korea’ 신발이 시너지 효과를 내었다.

 

최고의 기술은 세계가 인정했다. 나이키, 리복, 아디다스 같은 굴지의 신발회사가 한국으로 몰렸다. 세계 최고의 연질 폴리우레탄 폼이 그들을 한국으로 이끌었던 셈이다. 지금도 ‘Made in Korea, Designed by Nike’는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명품 신발로 인정받는다. 나이키도 잘했지만 나이키 혼자 잘해서 나이키가 된 게 아니라 한국의 세계 최고 기술이 더해지면서 나이키가 되었다. 그렇지 않은가.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