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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㉗ 신발의 그림
작성일 2023-03-19 조회수 519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㉗ 신발의 그림

2023-03-19 519


신발이바구신발의 그림

 

보면서도 보지 못했던 우리의 신발을 보다

 

인류가 있는 한 신발은 망하지 않는다.’ 신발회사에 다니던 1980년대 자주 듣던 말이다. 1980년대 신발산업은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어렵다가도 한순간 확 풀렸고 그러다가 어렵기를 반복했다.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 때 이 말은 위안이 되었다. 인류와 함께하는 신발산업은 미래가 창창하니 낙담하지 말자는 다독거림이었고 자기 다짐이었다.

신발의 역사만큼이나 그림의 역사도 길다. 어쩌면 신발의 역사보다 길다. 신발이 등장하기 이전 원시인이 그렸을 동굴 벽화나 암벽 부조가 그것을 증명한다. 신발 이전의 그림은 그렇다 치고 신발이 등장한 이후의 그림에서 신발은 어떻게 나타날까. 그것이 궁금하다면 한국신발관 2층 역사전시관이 답이다.

한국신발관은 한국 유일의 신발 전문관이다. 1980년대 신발의 세계 챔피언 한국을 기념하고 부산을 기념하는 한국 신발산업 랜드마크다. 한국 신발의 역사가 여기 다 있고 한국 신발의 현재와 미래가 여기 다 있다. 20182월 부산시가 설립해 부산경제진흥원 신발산업진흥센터가 운영한다. 1980년대 신발 대기업 밀집지였던 부산진구에 있다. 도시철도 2호선 개금역 2번 출구에서 10분 남짓 거리다.

전통회화 속의 우리 신.’ 한국신발관 역사전시관은 고구려부터 조선의 회화에 나타난 신발을 조명한다. 모르고 보면 그냥 지나쳤을 그림 속의 신발이 일일이 표시를 하고 해설을 곁들여 돋보기로 보듯 크고 또렷하게 보인다. 고구려 고분에서 김홍도의 씨름도에 이르기까지 옛 사람이 신었던 신발의 역사가 일목요연 가지런하다.

 

  

* 한국신발관에 전시중인 전통회화 속의 우리 신에 나오는 고구려 고분 벽화. 단화를 신고 춤추는 사람들(무용총 가무도)과 목이 긴 화를 앞에 둔 부부의 모습(쌍영총 묘주부부도)을 그렸다.

 

전시관 첫 그림은 고구려 고분 무용총의 가무도(歌舞圖). 고구려 사람은 목이 짧은 이()와 목은 길고 밑창은 두꺼운 화()를 신었다. 화는 요즘의 반장화라고 보면 된다. 무용총 가무도는 춤추는 사람들이 신은 단화를 그렸다. 단화도 날렵하고 춤사위도 날렵하다. 무덤의 주인인 망자가 이 그림을 보고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추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으리라. 

쌍영총은 고구려의 또 다른 고분이다. 이 고분의 묘주부부도(墓主夫婦圖) 역시 신발이 선명하다. 묘 주인의 부부를 그린 이 그림에선 목이 긴 화가 등장한다. 부부는 평상에 앉았고 부부 뒤에 두 사람의 신발이 놓였다. 쌍영총은 평안남도 남포에 있다. 살아서 영화를 누린 부부는 죽어서도 그 영화가 지속하기를 바란다. 묘주부부도는 영세불망의 영화를 드러낸다.

양직공도 백제사신도는 백제 무령왕[재위 501523] 때 그림이다. 그림은 현재 중국 난징박물관에 있다. 사신은 바지와 저고리 차림에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신었다. 통일신라 사람의 신발도 보인다. 그 시절 귀족은 귀하고 비싼 자주색 사슴 가죽과 비단으로 만든 신발을 애용했다.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는 고려 그림. 공민왕[재위 13511374] 시절에 그렸다. 말을 타고 사냥하는 장면을 담았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말을 탈 때 목이 긴 신발을 신었다. 천산대렵도는 말을 타고 힘차게 내달리는 사냥꾼을 가늘고 섬세한 필치로 그린 명작이다. 다만 머리가 우리 머리가 아니고 몽골 머리다. 고려는 한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그때 그림이다.

 

* 조선의 궁중화가 김홍도의 대표작 씨름.’ 신은 신발과 벗은 신발, 양반의 신발과 마부의 신발 등 조선의 신발을 골고루 그린 조선의 신발장이기도 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윤복의 대쾌도(大快圖)는 제목 그대로 크게 상쾌하다.’ 그림에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죄다 상쾌하다. 한국신발관이 전시하는 대쾌도는 신발을 강조하느라 부분만 확대했지만 전체적으론 씨름과 택견을 구경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등장인물 가운데 승려는 짚신, 홍색포를 입은 사대부는 흑혜, 옥색포를 입은 사대부는 일종의 운혜를 신었다. 직업이나 계층에 따라 신발이 달랐음을 그림은 보여준다.

조선시대는 그랬다. 이전 시대보다 신발이 다양했다. 김이안(17221791)이 그린 세 사람의 초상화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이안 본인과 신임, 심득경의 초상화를 통해 조선시대는 다양한 색상과 무늬로 장식한 혜가 상용화됐음을 알 수 있다. 신발을 만드는 장인(匠人) 갖바치의 수요도 그만큼 늘어났다. 조선시대는 갖바치의 시대였다. ‘갖바치 내일 모레란 속담이 그때 생겼다. 속담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

한국신발관이 전시하는 신발의 그림 대단원은 김홍도. 김홍도는 조선 500년을 대표하는 화가였다. 그가 그린 그림 하나하나 조선 500년을 대표하는 걸작이었다. 김홍도는 조선의 총명한 임금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궁중화원으로 활약했다. 서민들의 일상적인 삶을 간결하면서도 대담한 필치로 그렸다. 해학적이고 풍자적으로 묘사하며 풍속화의 회화성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그린 씨름은 걸작 중의 걸작이다. 신발의 입장에선 더욱 그렇다. 이 그림에선 신발이 다채롭게 등장한다. 신은 신발과 벗은 신발이 나오고 씨름을 하다가 들린 씨름꾼의 신발과 든 씨름꾼의 신발, 양반의 가죽신과 털벙거지를 쓴 마부의 짚신 등등 그야말로 조선의 신발장이 김홍도 씨름이다.

인류와 신발. 그리고 신발과 그림. 여태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이들은 함께할 것이다. 인류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듯 신발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듯 그림도 조금씩 나아가며 그때그때의 인류를 담고 그때그때의 신발을 담을 것이다. 한국신발관 전통회화 속의 우리 신전시는 그림을 보면서도 보지 못했던 우리의 신발을 보게 하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