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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㉔ 슈독
작성일 2022-11-12 조회수 505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㉔ 슈독

2022-11-12 505


신발 이바구<슈독>

 

12켤레 신발로 창업한 나이키 일대기

 

<슈독(SHOE DOG)>은 톡톡 튀는 용어다. 의역하면 신발에 미친 사람쯤 된다. 신발만 보며 나아가는 사람 내지는 한평생 신발과 보낸 사람이 슈독에 해당한다. MZ세대가 선호할 법한 이 용어를 세계적으로 퍼뜨린 이는 나이키 창업주인 1938년생 필 나이트였다. 필 나이트가 2016년 펴낸 자서전 제목이 <슈독>이었다.

자서전 <슈독>은 울림이 컸다. 나이키는 우리 시대 문화 아이콘이기에 현재의 슈독은 물론 미래의 슈독, 심지어는 슈독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이도 반응했다. 중고 자동차 트렁크에 운동화를 싣고 다니며 판매하던 보따리상 필 나이트가 좌절의 순간들을 무수하게 넘어서며 마침내 세계 최고의 브랜드가 되는 과정에서 내보인 기업가 정신은 그야말로 감동 실화였다.

필 나이트와 신발. 나이트를 신발로 이끈 장본인은 대학원 시절 쓴 논문 한 편이었다. 오리건대학을 거쳐 스탠퍼드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나이트는 기업가 정신 강좌를 수강하며 제출한 리포트가 신발산업에 관한 보고서였다. 오리건대학 육상출신답게 나이트는 러닝화에 관심이 많았다. 일본 카메라가 독일 카메라를 제쳤듯 일본 러닝화가 아디다스로 대표되는 독일을 넘어서서 세계 시장을 장악할 것으로 내다본 논문이었다. 논문은 A 학점을 받았다.

자서전 <슈독>은 필 나이트의 생애를 연대별로 기술한다. 맨 앞에 등장하는 해가 1962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서도 빈둥대던 몽상가 내지는 미친 생각공상가 필 나이트는 1962년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 세계여행에 나선다. 그러나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미래의 세계 신발 챔피언 일본에 들러 그간의 구상을 현실화할 참이었다.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 자서전 <슈독영문판맨 위 “You must forget yours Limit.”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There is no finish line.(결승선은 없다)’와 함께 나이트의 인생철학 내지 나이키의 기업문화를 압축하는 한 문장이다. <슈독국내판은 2016년 사회평론에서 나왔다. 

 

오니스카 타이거. 나이트가 즐겨 쓰던 미친 생각의 현실화였다. 일본의 남부 공업도시 고베에서 매달 15,000켤레를 생산하는 대기업 오니스카를 무턱대고 찾아갔고 거기서 오니스카 신발 타이거를 미국 시장에서 판매하는 계약을 따낸다. 계약을 위해선 회사명이 필요했다. 무직자 나이트가 얼떨결에 댄 명칭이 블루리본 스포츠였다. 나이트 방엔 블루리본이 수두룩했다. 학창시절 육상경기에서 상으로 받은 리본이었다. 그걸 회사명으로 대었고 1976년 나이키사(Nike, Inc.)를 설립할 때까지 썼다.

50달러와 12켤레. 나이트는 196250달러를 우편환으로 오니스카에 지불하고 1964년 첫 주에 샘플 제품 12켤레를 받는다. 반응이 좋았다. 1,000달러 300켤레를 주문하고 타이거 슈즈의 미국 서부 독점 판매에 나선다. 독점 판매라곤 하지만 보따리상이었다. 트렁크에 싣고서 스포츠용품점을 찾아다녔다. 몇 번 문전박대를 당하고선 판매 전략을 바꿨다. 북서 태평양 연안의 육상경기장을 구석구석 찾아다녔다. 경기 시작 전에 코치와 선수, 팬에게 신발을 홍보했다. 반응이 대단했다. ‘주문서를 작성하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두 배로 성장했다. 19647300켤레를 모두 팔고 900켤레를 추가 주문했다. 현금이 부족해 유동성 위기란 줄타기를 매달매달 가까스로 넘겼지만 성장은 늘 곱의 곱이었다. 196644,000달러를 팔았고 그다음 해는 84,000달러를 팔았다. 5년 연속 두 배씩 컸다. 하지만 세계 운동화 시장은 여전히 독일 일색이었다. 독일인 형제가 경영하던 아디다스와 퓨마와 필적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필 나이트는 자신이 운동선수 출신인 점을 십분 활용했다. 유명 선수들이 광고에 등장했다. 오리건대학 육상 스승이었던 바우어만 코치는 블루리본 창업 동업자로서, 미국 올림픽 육상팀 코치로서 성장을 견인했다.

1971. 나이키가 탄생한 해다. 그리스신화 승리의 여신 니케(NIKE)와 철자가 같다. 필 나이트는 1962년 세계여행에서 여신 니케의 신전을 접한 바 있었다. 나이키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이듬해 1972년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 스포츠용품협회 전시회였다. 번개가 치는 듯한 로고는 포틀랜드주립대학교에서 강의할 때 교정에서 우연히 본 젊은 화가 캐럴린 데이비드슨 작품이었다. 1972년 시카고 전시회에서 이 로고에 대해 기자들이 묻자 나이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누군가가 당신 곁을 지나갈 때 나는 소리입니다.”

자서전 <슈독>에선 한국이 여러 번 언급된다. 1974년 일본 오니스카와 결별한 전후로 필 나이트는 생산기지 다변화에 나섰다. 일본은 임금 상승과 달러화 가치 하락으로 매력을 잃어가던 차였다. 한국과 타이완을 비교하면서 한국에는 대규모 공장이 몇 곳 있지만, 타이완에는 소규모 공장이 100여 곳 건설 중이다라는 1976년 언급, ‘한국에도 소규모 공장이 두 곳 있었지만, 여전히 수요를 충족시키기 어려웠다. 한국에는 예전부터 5대 신발공장이 있었는데, 이들 간의 경쟁이 너무나도 치열한 나머지 곧 공장 문을 닫아야만 할 것 같았다1977년 언급, ‘타이완과 한국의 공장은 나날이 번창했다1978년 언급 등이다.

이러한 언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이키가 한국에서 처음 주문 제조한 때가 오니스카와 결별한 1974년 전후에서 한국의 공장을 처음 언급한 1976년 사이였다는 이야기다. 필 나이트는 오니스카와 계약 관계일 때는 나이키를 오니스카 타이거 매장에서 판매한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했다. 그러므로 오니스카와 완전히 결별한 1974년 이전에는 일본과 가까운 한국에 나이키 생산 공장을 두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산 나이키는 1970년대 중반 이후 나왔다. 여러 군데서 만들었다. 현재 한국 어디에서 나이키를 맨 처음 만들었는지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가 없다. 자기 회사에서 나이키를 맨 처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데는 있지만 문제는 그런 데가 한 군데가 아니란 점이다. 그래도 맨 처음 만든 데는 분명히 있을 터. 거기가 어딜까? 거기가 어딘지 다음 회와 다다음 회에 알아본다.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