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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⑰ 한국 최초의 신발주머니
작성일 2022-05-09 조회수 789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⑰ 한국 최초의 신발주머니

2022-05-09 789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신발주머니

 

한국 최초의 신발주머니

 

오래된 신문 기사 하나를 보자. 초등학생 신발주머니가 추억 속으로 사라진다는 내용이다. 2016211일 경향신문 보도다.

 

서울시교육청이 올해까지 서울 시내 모든 초등학교에 개인용 신발장을 설치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서울 지역 초등학교에서 신발주머니는 추억 속으로 사라질 전망이다.

서울시교육청은 10초등학교 신발주머니 불편 해소 사업을 올해까지 마무리하기로 하고 개인용 신발장이 설치되지 않은 서울 시내 초등학교 100여 곳에 학교당 500만 원 안팎의 예산을 지원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지원금은 각 학교가 학생들을 위한 개인용 신발장과 신발 털이기, 현관 매트 등을 설치하는 데 사용될 예정이다. 개인용 신발장이 설치되면 학생들은 실내화를 신발주머니에 가지고 다니지 않고 신발장에 보관해 둘 수 있다.

초등학교 신발주머니 불편 해소 사업은 2014년 말 계획이 수립돼 지난해부터 본격 시작됐다. 초등학생들이 실내화를 분실할 우려와 위생상의 문제 등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당시 서울 시내 초등학생의 77%가 신발주머니를 가지고 다녔다.

교육청은 예산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서울 시내 초등학교에 개인용 신발장 등을 순차적으로 설치해 왔다. 올해 나머지 100여 곳의 학교에 대해서도 예산을 지원해 사업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올해 100여 개 학교를 대상으로 사업을 진행하면 거의 대부분의 학교에 신발장 설치가 완료될 것이라며 앞으로 서울에서 초등학생들이 신발주머니를 들고 다니는 일은 추억 속의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초등학생 신발주머니는 추억 주머니였다. 도시락만큼이나 학생들 가까이 있었다. 교실에서 신을 신발이 담긴 신발주머니는 개인 사물이었다. 자기 이름을 표기해 보관했다. 책가방에 매달거나 들고 다녔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신나는 마음에 신발주머니를 휘돌리며 교문을 빠져나가기도 했다.

경향신문 기사는 그런 신발주머니가 사라진다는 내용. 개인용 신발장, 나아가 개인 사물함을 비치해 분실 우려와 위생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교육청의 방침을 소개했다. 개인용 신발장 설치는 전국에서 순차적으로 이뤄지면서 이후 신발주머니는 추억 속으로 사라진 주머니, 추억의 주머니가 되었다.

그러면 신발주머니는 언제, 어떻게 해서 생겼을까. 거기에 대한 해답은 어디에도 없다. 명쾌한 해답도 없고 어렴풋한 해답도 없다. 기록이 없는 탓이다. 주연에 해당하는 신발의 역사에는 관심을 기울였어도 조연에 불과한 신발주머니의 역사에는 무심했다. 신발주머니의 역사를 알면 신발의 역사도 풍성해지리라.

1968. 초등학생 신발주머니가 최초로 선보인 해다. 1968년이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는가.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1968년 그해를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인류가 최초로 달에 착륙한 때가 그때다. 달 착륙을 기념하는 행사로 세계가 들떴다. 초등학생이던 나도 영문은 몰랐지만 들떴다.

1968년 그해 한국의 신발도 들떴다. 한국 최초로 나일론 만화슈즈가 나왔다. 고무신 일색의 초등학생 학생화에서 나일론 만화슈즈의 등장은 가히 혁명이었다. 나오자마자 단숨에 아동화 시장의 강자로 떠올랐다. 고무신이 닳아서 해져도 새 고무신을 사는 대신 기워서 신고는 했지만 한국의 아동에게 나일론 만화슈즈는 언젠가는 정복해야 할 명품이었다.

예수 사랑한다고 예배당에 갔더니

눈 감으라 해 놓고 신발 뚱쳐 가더라.

 

다 같이 못 살던 시절의 노래 아닌 노래다. 여기서 말하는 신발은 새 고무신쯤 된다. 교회당 현관 같은 곳에 벗어둔 고무신을 분실하는 사고가 종종 일어나던 세태를 빗댔다. 고무신이 비슷비슷해서 실수로 바꿔 신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고무신도 그러거늘 하물며 천하의 만화슈즈였다. 훔치겠다고 작정해서가 아니라 신기하고 부러운 마음이 끼어들 소지가 다분했다.

거기에 대한 대비책이 신발주머니였다. ‘삐까번쩍한재질과 디자인으로 무장한 신발주머니는 명품 아동화를 지근거리에서 보호하는 최상의 무기였다. 신발주머니와 한 조를 이룬 나일론 만화슈즈는 일약 강호의 고수가 되어 아동화 시장을 평정해 나갔다. 신발 대리점마다 나일론 만화슈즈를 달라며 아우성쳤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부모들 등살을 긁으며 아우성쳤다.

 

 

 

한국 최초로 신발주머니를 탄생시킨 나일론 만화슈즈를 생산했던 삼화의 범천동 본사 광고판. ‘00표 고무신에서 ‘00표 신발을 최초로 쓴 게 삼화의 범표 신발이었다

 

나일론 만화슈즈를 처음 만든 신발회사는 삼화였다. 삼화는 1965년 한국 신발 최초로 일본고무주식회사와 기술제휴를 맺었다. 드디어 1968. 당시 신발업계는 베트남 참전 미군에 납품하는 정글화 등으로 수출 비중이 높았지만 내수시장 확대도 경쟁이 치열했다. 당시 톱 메이커는 여섯 곳. 삼화고무(범표)를 비롯해 태화고무(말표), 국제화학(왕자표), 진양화학(3천번), 동양고무(기차표), 동신화학(오리표)였다. 동신화학은 서울 메이커였다.

나일론 만화슈즈는 내수시장을 노린 삼화의 야심작이었다. 사실, 나이론 만화슈즈는 기술제휴를 맺은 일본고무()의 특허품이었다. 미래 가능성을 읽은 삼화는 국내 특허를 받아 제조와 판매에 나섰다. 인류가 달착륙에 성공하자 한발 앞서 의장 등록한 달에서 암석을 채취하는 암스트롱만화슈즈는 인기의 제왕이었고 영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남포동 동명극장 개봉과 때맞춰 극장 로비에서 시판한 웨스트사이드 슈즈도 인기몰이에 가세했다. 전국 대리점이 돈 보따리 들고 와서 거래계약을 맺자고 아우성쳤고 동종 타사에선 자기 대리점에 삼화 만화슈즈가 있다며 항의했다.

나일론 만화슈즈는 나오는 족족 절판이었다. 만화슈즈를 담은 신발주머니까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만화슈즈는 신발 풍속도를 바꾸었다. 단순히 신는 신발에서 패션 감각을 가미한 보이는 신발, 신 끈으로 아무렇게나 둘둘 말은 포장에서 상자에 넣은 포장에 신발주머니까지 한국의 신발을 업그레이드했다. 만화슈즈의 동반자 신발주머니는 처음 나온 1968년부터 추억 속으로 사라진 2016년까지 근 오십 년 동안 주연 못지않은 빛나는 조연이었다.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