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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⑪ 도변고무와 김영준
작성일 2021-12-24 조회수 1041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⑪ 도변고무와 김영준

2021-12-24 1041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11 선만고무와 일영고무

 

1926년부터 5년간 부산 고무공장의 전설

 

한국 고무신 역사에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 호를 백하(白霞)로 썼던 김영준(19001948)이다. 그는 부산에서 시작해 조선팔도 주요 도시에 고무신공장을 세웠으며 1930년대 초반 일제 주도의 통폐합에 결연히 저항하며 오히려 사업을 확장, 일제강점기 고무계의 패왕(覇王)’으로 불렸다.

김영준은 경남 의령 대산리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전남 여수다. 초가삼간에서 시래기죽으로 연명하는 극빈 농가 다섯 남매의 3남이었다. 15세에 일본인 상점 점원이 되었다. 성실성과 상재(商材)를 신인(信認) 받아 일본으로 갈 기회가 생겼다. 1923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시 와타나베고무공업소에서 일하다가 1926년 귀국했다.

도변(渡邊, 와타나베)고무. 일본인 고무공장에서 고무 배합기술을 익힌 김영준이 1926년 부산에 세운 고무공장 상호다. 1930년 실린 박스 광고에는 공장 주소가 부산 수정(水晶) 89’로 나온다. 김영준은 직접 기계를 돌렸으며 원료를 배합했다. 누가 봐도 사장이 아니라 직공처럼 보였고 그렇게 일했다. 도변 고무신은 품질이 우수해 단기간에 정상급에 올랐다. 1930년 직공 200여 명, 연간 70만 족을 생산하는 대규모 회사로 나아갔다.

그러자 송사에 휘말렸다. 도변고무가 일본인 고무공장 환대(丸大. 환다이)고무를 압도하자 거기서 유사상표 사용을 빌미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환대고무는 고베시에 본사가 있었다. 조선 현지에서 고무신을 생산하고 판매할 요량으로 192641일 부산 대창정(大倉町) 10번지[현 부산 중구 중앙동 옛 부산역 인근]에 수족처럼 세운 공장이 조선의 환대고무였다.

 

 

* 1930년 제작한 <대일본직업별명세도> 194부산부(釜山附)’ 지도의 뒷면 안내기(案內記)에 박스 형태로 실린 도변(와타나베)고무 광고. 왼쪽에 보이는 사진이 삼화고무 전신에 해당하는 환대고무 생산 현장이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당시 부산에선 환대고무가 가장 컸다. 수원 이남의 고무공장 통폐합 와중에 출범한 삼화회(三和會)의 숨은 실력자였다. 1934년 여러 공장이 삼화고무로 통폐합하기 이전 부산에서 가장 큰 고무공장이었다. 일영고무 등을 흡수·합병해 새롭게 출범한 삼화고무의 전신이 환대고무라고 보면 된다. 환대고무 원래 명칭은 요네쿠라고무공업소였다. 본점과 공장이 고베에 있었다. 삼화고무를 창업한 요네쿠라 세이자부로가 대표였다.

요네쿠라고무는 191912월 판매 전담 부산지점을 대창정 10번지에 두었다. 생산이 아닌 판매 전담이었다. 19198월 서울에서 출범한 대륙고무도 그랬다. 그때만 해도 직접 생산 역량이 안 돼 일제를 판매했다. 개인회사인 요네쿠라고무는 1926년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상호를 환대고무로 바꾸었다. 부산과 원산에 지점이 있었고 조선과 일본에 특약점 50여 군데를 운영했다. 그 정도의 대기업강소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으니 결과는 뻔했다.

더구나 환대고무는 경영주가 일본인이었다. 일제로선 환대고무를 위협하는 도변고무를 그냥 놔둘 수 없었다. 재판에 개입했을 테고 그 결과 도변고무는 쫄딱망했다. 1930년 무렵이었다. 김영준은 전 재산을 날리는 비운을 맞았고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환대고무에 상무로 들어가 굴욕의 5년을 보냈다.

김영준은 기어이 재기했다. 1935년 전남 여수에 하늘 아래 단 하나천일(天一)고무를 설립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사업은 일취월장 번창했다. 재기 3년 만에 서울, 부산, 대구, 이리, 광주, 영산포, 구례 등 조선팔도 굵직굵직한 도시 15군데 가까이 공장을 둔 대기업을 일구었다. 훗날 개성상인의 대표이자 개풍그룹 창업주인 이정림(19131990)이 김영준과 협상해 경기, 황해, 강원도 총대리점권을 확보해 갔을 만큼 천일고무는 당대 조선 최고의 고무신 메이커였다.

김영준의 일거수일투족은 언론의 관심사였다. 요즘 같으면 파파라치가 따라다니고도 남았다. 일본인 하시마의 김해 농장 3,300정보(町步) 매입은 당대 최고의 뉴스였다. 배우지 못한 한을 후대에 물려주지 않으려고 1938년 전남 여수에 미평(美坪)학교를 설립했다. 광복이 되자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겨 한국 최초로 해외무역에 나섰으며 원양어업은 언감생심이던 시절에 한국원양어업회사를 차렸다. 방직업에도 손을 대 여수에 조일직물공장을 세웠다. 1948년 정부 수립 후에는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으로 뽑혔다.

 

 

* 전남 여수 미평초등학교 교정의 김영준 기념비. 이 학교 전신인 미평학교를 김영준이 설립했다

 

그러나 끝이 좋지 않았다. 장형 김재준의 환갑연 참석차 19481015일 서울에서 내려와 여수에 머물다가 여순사건을 맞았다. 좌익계 군인들에 의해 부르주아 기업인으로 지목돼 그해 1023일 유명을 달리했다. 쉰이 채 되지 않은 나이였다. 가매장했다가 195031일 여수시 사회장을 치른 뒤 둔덕동 야산에 안장했다. 여수시는 1969시민의 상을 추서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김곡영준(金谷英俊). 그의 일본식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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