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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⑨ 삼화회
작성일 2021-11-25 조회수 960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⑨ 삼화회

2021-11-25 960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삼화회

 

삼화는 왜 삼화일까

 

* 1930년대 삼화고무. 1933년 결성한 삼화회(三和會)가 삼화고무 상호의 시작이다출처=사진으로 보는 부산변천사 부산대관 

 

1980년대는 한국 신발의 전성기였다. 맏형 격인 삼화를 비롯해 국제, 태화, 동양, 진양, 대양, 세원, 태광실업 등이 한국 신발을 이끌었다. 그런데, 삼화는 왜 삼화일까. 다른 회사는 정확히는 몰라도 상호가 지향하는 바가 대충 짐작되는데 삼화는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왜 삼화일까.

강원도에 갔더니 삼화사란 절이 있더라. 우리 회사와 한자 이름이 같던데.” 1980년대 후반 어느 여름날 박수문 기획담당이사가 나를 불렀다. 주식회사 삼화의 기획부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사보 제작을 비롯해 홍보, 언론 담당 등의 일을 보고 있었다. 1991년 창립 60주년을 앞두고는 <삼화 60년사> 편찬도 내 몫이었다. 여름휴가를 강원도 두타산에서 보낸 기획이사가 나를 부르더니 절 이름을 거론하며 삼화의 뜻을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절 이름으로 썼으니 불교용어인가 싶었다. 짐작은 맞았다. 삼화(三和)는 불가에서 세 가지 화합을 의미하는 용어였다. 세 가지는 근(((). 잘은 몰라도 불교가 내세우는 가치인가 싶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게 왜? 오리무중이었다. 불교용어가 어째서 신발회사 상호가 됐는지는 끝내 풀지 못했다. 1990년대 신발산업이 어려워지면서 <삼화 60년사> 발간 또한 물 건너갔다.

숙제를 푼 것은 30년 가까이 지나서였다. 2018년 펴낸 한국 신발 100년사 <고무신에서 나이키까지>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삼화가 무슨 뜻인지 마침내 알게 되었다. 자료를 찾느라 일제강점기 신문을 뒤지게 되었고 책갈피 낙엽처럼 삼화가 툭 나왔다. 그러나 기쁘지만은 않았다. ‘모르고 넘어가면 좋았을걸.’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삼화는 뜻이 어마무시했다. 불교용어인데도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피비린내가 났다. 한국 신발 100년사에 두고두고 기록될 흑역사의 한 페이지가 삼화였다. 일제강점기 신발업계에 등장한 삼화는 처음엔 특정 기업의 상호가 아니었다.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고무신 공장을 대거 망라한 단체의 명칭이었다.

단체의 명칭은 삼화회였다. 삼화회(三和會). 1933년 등장한 이 단체는 조선의 신발 시장을 일제의 의도대로 이끌어가려는 가진 자의 농간이었다. 일제는 삼화회를 통해 시장을 통제하면서 시장 질서를 왜곡하려고 했다. 1919년 태동한 이래 조선의 신발산업은 고공 성장을 거듭하면서 토종자본 내지는 일제에 비우호적인 기업이 일본기업 내지는 친일기업과 경쟁 우위를 점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빼든 칼이 폐업과 합병이었고 그 와중에 조직한 단체가 삼화회였다.

폐업과 합병을 전제로 한 생산과 판매 통제 논의는 1932년 드셌다. 논의의 주체는 일본 재벌 삼정(三井, 미쓰이)물산과 남선고무공업협회였다. 삼정물산은 신발 원료인 고무를 동남아에서 도맡아 수입했고 남선고무는 수원 이남의 부산, 대구, 군산, 이리, 목포, 여수 등 남조선 29개 고무신공장으로 조직한 민간 경제단체였다.

생산과 판매 통제 논의는 반발이 따랐다. 조선 토종자본으로 세운 회사는 심하게 반발했다. 삼정물산과 남선고무가 결탁하여 일본기업 위주로 새 판을 짜려는 의도가 읽혔다. 삼정이 연 500만 원에 이르는 고무신 원료를 독점 공급하며 판매권마저 독점하겠다는 조항은 누가 봐도 조선기업을 압박하는 독소 조항이었다.

파란을 거듭했고 논의는 결국 반쪽짜리가 됐다. 29개 공장 가운데 일본자본 위주의 10개 공장만 통제에 합의했다. 이들이 결성한 단체가 삼화회였다. 반발이 심했던 만큼 화합을 상징하는 단체명이 필요했고 그래서 등장한 게 화합을 내세운 불교용어 삼화였다. 논의 과정에서 도출했던 반발과 파란은 깡그리 잊고 자기들끼리라도 화합하자는 의미였다. 이후 요네쿠라고무공업사에서 발전한 환대(丸大)고무가 삼화를 상호로 쓰면서 특정 기업명이 되었다.

물론 이때의 삼화와 해방 이후 부산의 기업인 김지태가 운영하던 삼화는 완전히 다르다. 해방 이후 삼화는 몇 차례 경영 주체가 바뀌었고 김지태가 삼화를 인수한 것은 1958년이었다. 1954년 자본참여와 동시에 이사로 취임했다가 부산상고 후배인 김예준 사장이 1958타계하자 완전히 인수했다. 김지태의 자본참여는 삼화의 자금난에 물꼬를 터 달라고 김예준 사장이 요청해서였다. 김지태 자택 바로 앞에 삼화가 있어서 인정상 나 몰라라 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다시 삼화회로 돌아가자. 삼화회의 등장은 조선 신발업계 빅뉴스였다. 당대 조선을 대표하던 민족지가 이걸 놓칠 리 없었다. 동아일보는 1933221일과 411일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해 삼화회 등장을 보도한다. 행간에 울분이 스민 보도였다. 기사 하나를 소개한다.

  


 

남조선십공장 가입(南朝鮮十工場加入) 고무 통제 성립(統制成立) 

 

조선사람의 일상생활 필요품이라 할 만치 보급된 고무신의 생산판매 통제를 계획하는 일본 대재벌 삼정물산과 남선고무공업협회가 작년부터 누차 교섭하여 고무신 통제를 하고자 비상히 운동하여 대화(大和) 기타 여러 공장에서 통제를 반대하여 한동안 파란을 거듭하더니 삼정 측과 협회 측에서는 반대자를 제외하고 삼화회(三和會)’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대자본의 위력으로서 통제 반대자를 여지없이 몰락시킬 작전을 세우고 수원 이남을 통제구역으로 정하고 남선 일대 29개 공장 중 겨우 10개 회사만을 규합하여 지난 8일 통제협정에 정식 조인이 되었다 한다. 가입공장은 부산 율전고무, 환대고무, 부산고무, 일영고무, 능암고무, 시마사 등 여섯 공장과 삼정물산, 여수, 천일, 대구욱(), 호마라, 광주욱분공장 10공장이다.

- 동아일보 1933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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