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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⑧ 대륙고무와 이하영
작성일 2021-10-29 조회수 1081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⑧ 대륙고무와 이하영

2021-10-29 1081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대륙고무와 이하영


한국 최초의 고무신공장 사장은 부산 사람

 

대륙고무는 한국 최초의 고무신공장이다. 19198월 서울에서 출범했다. 그해 3월 들불처럼 번진 만세운동에 화들짝 놀란 일제는 조선을 죄던 목줄을 약간 느슨하게 풀었다. 조선의 자본에 숨통이 트였고 그러면서 등장한 게 조선사람 이하영이 설립한 대륙고무였다.

대륙고무는 부산과 연이 깊었다. 이하영 사장이 부산 기장 출신이었다. 이하영은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일본인 여관 사환에서 시작해 구한말 대신까지 지냈다. 학교 다닌 적이 전혀 없어 일자무식의 대신으로 불렸다. 여관 사환이 고종임금을 보필하는 장관까지 지냈으니 출세도 그런 출세가 없었다.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종찬이 손자다.

이하영(李夏榮)1858년 기장에서 태어났다. 거기가 일광면 이천리라는 사람도 있고 기장읍 교리라는 사람도 있다. 둘 다 맞을 것이다. 어릴 때 기장에 열병이 창궐하면서 부모가 모두 사망하자 가까운 일가 이규봉의 집에 얹혀살았기 때문이다. 이규봉의 집도 곤궁해 오래 있지는 못했다. 집을 나가 오일장이 서던 장안읍 좌천에서 걸식하며 연명했다.

이천리(伊川里)와 이을포(伊乙浦). 여담 한마디를 하자면 이천리의 원래 지명은 이을포였다. 이하영은 나중에 고관대작이 되면서 고향 이을포를 이천리로 개명했다. 일종의 신분 세탁이었다. 비천한 갯가 냄새가 나는 이을포 대신 어딘가 고상해 보이는 이천리로 바꾸었다. 장안읍 좌천에서 걸식하던 이하영은 일본인이 경영하던 부산 시내 여관에 취직했다. 좌천 오일장을 드나들던 보부상이 어린 하영을 불쌍히 여겨 단골 여관에 부탁한 덕분이었다. 일본인 상점 점원으로 취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와 관련해선 한 일기가 관심을 끈다. 이하영이 타계한 다음 날인 1929228일 윤치호가 쓴 일기다. 윤치호(1865~1945)는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했으나 훗날 친일파로 변절한 인물이다. 해당 일기는 다음과 같다.

 

* 대륙고무공장의 작업 광경. 192611일 조선일보 신년 특집호에 실린 사진이다.

 

이하영 씨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부산 거리에서 찹쌀떡 행상을 하며 인생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어서 미국 공사관에서 근무하던 알렌 박사의 요리사로 일했다. 그런 다음 외무대신에 올랐고, 자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조선에서 성공에 성공을 거듭했다. 본래 그는 편지 한 장 쓸 수 없을 정도로 무식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양반 가문 출신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점잔을 빼며 처신했다. 

 

이하영은 스물여섯이던 1884년 경제적으로 자립했다. 사업을 시작했고 일본과 조선을 오가는 배에서 미국 의료선교사 호러스 앨런을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를 따라 서울로 갔고 어깨 너머로 영어와 의술을 배웠다. 몇 년이 흘렀다. 왕비인 명성황후가 병이 났다. 궁중의 전의(典醫)였던 선교사는 고국에 일시 가 있었다. 하영은 자처하여 진료에 나섰다. 일어도 능통하고 영어도 능통하며 의술까지 갖춘 하영은 이내 왕비의 눈에 들었다. 공직에 임명됐다. 외교담당 부서인 외무아문(外務衙門)의 주사 자리였다.

이하영은 한국 최초로 미국인 여자와 결혼한 공무원이 될 뻔했다. 승진을 거듭해 외교관 신분으로 미국에 부임했다. 2년 동안 미국 주재 공사관 서기관이자 전권대사 서리로 근무했다. 거기서 미국인 여인을 사궜지만 조선 조정의 반대로 결혼엔 이르지 못했다. 이하영은 왈츠를 잘 췄다. 상투 머리로 미국 외교무대에서 왈츠를 춘 최초의 한국인이 이하영이었다. 이하영이 남긴 기록에 그때의 정황이 생생하게 나온다.

 

왼쪽은 1922년 9월 16일 동아일보에 실린 대륙고무 광고오른쪽은 1925년 4월 5일 매일신보 광고다대륙고무의 공장 규모를 엿볼 수 있는 사진이 실렸다. 

 

나는 돈을 물 쓰듯 뿌리며 활발한 외교를 시작하였다. 2년 남짓 워싱턴에 머무는 동안 영어도 유창하고 사교춤 솜씨도 늘었다. 초대받은 연회는 빠짐없이 참석했고, 귀부인과 어울려 사교 춤추기를 즐겼다. 상투를 튼 채 조선 버선에 구두를 신은 내가 무도회장에 나타날 때면 금발 미녀들이 나를 에워싸고 갈채를 보냈다. 밤새워 술을 마시고 금발 미녀들과 껴안고 춤추고 나면 근심과 우울은 모두 사라졌다. 나는 낮에 여는 연회는 미국 정부의 문무백관을 초청하고, 밤에 여는 연회는 상·하원 의원과 기자를 초대해 동방예의지국을 선전하기에 분주했다.

 

이하영은 성품이 무난했다. 가능하면 적을 만들지 않으려 했다. 그런 성품이 장관인 대신까지 오르게 했으며 그런 성품이 한국과 일본에 양다리를 걸치게 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탄 때는 요행히 을사오적엔 들진 않았지만 을사삼흉으로 분류된다. 자작이란 귀족에 올랐고 일본 천왕이 주는 은사금까지 챙겼다.

한국 최초의 신발 회사를 차린 종잣돈은 이 은사금에서 나왔다. 2019, 한국 신발 100주년이던 그해 기념행사 열자고 나서지 않은 이유도 이러한 시대적 정황에 기인한 바가 컸다. 조선 굴지의 대기업 대륙고무 사장이 된 이하영은 박영효와 이완용의 의붓형 이윤용 등을 주요 주주로 앉혀 사업 확장을 도모했고 이는 주효했다. 조선 최고의 고무신 브랜드로 등극했으며 조선팔도 곳곳에서 짝퉁이 쏟아졌다.

다음은 1922921일 동아일보 게재 대륙고무 광고 문구다. 문구를 보면 대륙고무 고무신을 본뜬 짝퉁이 얼마나 성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45년 광복 후에도 한동안은 최고의 고무신 브랜드였던 대륙고무는 19463월 미 군정청 감찰부에서 적산 기업체로 몰수한 이후 사라지는지도 모르게 사라졌다. 이하영은 1929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장지는 경기도 안산 동막골에 있다.

 

* 대륙고무 광고. ‘조선 신발의 원조란 뜻의 선화 원조(鮮靴元朝)’ 문구에서 대륙고무의 자신감을 읽을 수 있다.

  

본인이 경영한 대륙고무가 제조한 고무화를 출시하니 이왕(순종) 전하께서 어용하심을 얻어 황강함을 금치 못하며, 왕자 공주님들께서도 널리 애용하시고 또 나인들, 일반 고객들이 각별히 애용하셔서 날로달로 발전하여 이번에 주식회사 조직으로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고무업계의 원조로서 더욱더 매진하여 조선을 물론 일본과 만주까지 진출하겠사오니 더욱 애용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다른 회사가 조악한 제품을 본사의 제품이라고 사칭하여 판매하는 경우가 많사오니 본사 상호 대륙(大陸)’에 주의하시옵소서. - 19229월 대륙고무주식회사 사장 이하영

- 대륙고무 광고<1922921일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