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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⑦ 삼화여상
작성일 2021-10-22 조회수 1430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⑦ 삼화여상

2021-10-22 1430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삼화여상

 

주간학생이야 어찌 알겠습니까

뽀얀 작업복, 우리들 구슬땀을

 

야간여상. 여상도 귀하고 야간은 더욱 귀한 요즘. 야간여상은 이미 추억의 한 페이지로 넘어간 지 오래다. 그러나 한 세대 이전만 해도 야간여상은 일상적인 용어였다. 해 질 무렵이면 등교하는 여학생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고 그게 그렇게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한 세대 이전만 해도 그랬다.

그들은 대부분 산업체 부설학교 고교생이었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이었다. 낮에는 학교 가고 밤에는 학원 가는 생활에 익숙한 요즘 학생이 들으면 설마그러겠지만 그땐 그런 학생이 차고 넘쳤다. 중학교를 갓 졸업한 10대 어린 여학생이 3년을 꼬박 주경야독하던 시절이 그때였다.

 

1. 1989년 2월 11일 삼화여상 8회 졸업식 장면. 356명 졸업생 대표 황보선옥 양이 답사를 하고 있다. 


누군들 그러고 싶었을까.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오빠에 밀려, 남동생에 밀려 진학을 포기하고 생활전선에 일찌감치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이들. 공부에 대한 미련은 차마 버릴 수 없었기에 야간여상에 입학했고 졸음을 참아가며 공부해야 했던 이들. 누이 같은 이들이었고 언니 같은 이들이었다. 그들의 그런 각고의 인내와 헌신이 있었기에 집안은 일어섰고 지역은 돈이 돌았으며 한국은 개발도상국에서 경제대국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10대 소녀였다. 아무리 강한 척해도 속은 한없이 여렸다. ‘깨끗한 교복 입고 자연광선 아래서 수업하는 주간학생이야 어찌 알겠습니까. 뽀얀 작업복 입고 형광등 아래 산업전선에 있는 우리들 구슬땀을.’ ‘1학년, 2학년이 지나고 3학년이 되었습니다. 계획은 나름대로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객지생활 5년이 넘어도 부모님 생신날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불효자식이 되어야 했습니다.’

삼화여상도 야간여상이었다. 1970년대 중후반 한국 경제가 호황을 맞자 노동력의 안정적 확보가 산업체마다 관건이었다. 그래서 착안한 게 부설학교였다. 이를 통해 산업체는 노동력을, 입학생은 일자리와 진학을 보장받았다. 삼화여상은 당시 신발업계 선두주자 삼화가 설립한 산업체 부설 야간여상이었다.

진학 못 한 여학생은 도시보다 시골이 많았다. 그래서 삼화여상 학생도 시골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진주와 거창, 통영, 안동, 포항, 영주, 김천, 순천, 광주, 전주 등지의 경남북과 호남, 그리고 제주도에서 많이 왔다. 노동 강도가 세고 노동환경은 열악한 고무신공장, 그것도 객지의 공장에 취직해야 할 정도로 어렵게 컸으므로 생활력은 엄청 강했다. 월급이 10만 원이면 생활비 제하고 8, 9만 원을 적금에 들었다. 10명 중에 한 명이 그런 게 아니라 10명 중에 아홉 명이 그랬다.

야간여상은 산업체와 운명을 같이했다. 산업체가 문을 닫으면 자동으로 폐교했다. 삼화가 문을 닫은 건 1992915. 19903월 입학한 제13250여 명이 졸 다섯 달을 앞둔 폐업이었다. 다행히 학생들과 교사들이 요로에 간청하고 탄원해 졸업은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삼화여상 마지막 졸업생이었다.

 

 2. 1989년 11월 거제동 학교에서 있은 삼화여상 개교 12주년 기념 학생 작품전 모습시화전바자회꽃꽂이전 등이 열렸다. 

 

한동안은 삼화여상 졸업생이라는 걸 드러내지 않으려는 이가 많았다. 내가 삼화에 다녔던 만큼 내 주위에서 그런 이가 몇 있었다. 안타까웠지만 이해는 되었다. 오죽했으면 그럴까. 그리고 미안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들은 그 시대 주역이었고 한국 경제를 이만큼이나 이끈 영웅이었다. 종종 하는 이야기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있고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여기 우리가 있다.

책가방과 작업복 중 더 오래 간직하고 싶은 것은?’ 삼화에 다니며 사보를 편집하던 19882월호에 그해 제8회 졸업 예정자를 대상으로 책가방과 작업복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거기 응답 몇 가지를 여기 옮기며 삼화여상 졸업생 모두에게 큰절을 드린다. 삼화여상 동문회가 결성됐다는 소식에 며칠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 작업복. 첫 사회생활, 나의 피와 땀이 배어 있기 때문. 한때는 한스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 황길자

* 책가방. 그것을 지키기 위해 뼈 깎는 아픔을 감수했으므로. - 홍광임

* 책가방. 성장의 계기가 되었고 엔간한 어려움은 책가방을 보노라면 모두 견뎌낼 수 있으므로. - 김혜경

* 책가방은 나의 희망이었고 작업복은 자기를 절제하는 회초리였기에 둘 다 간직하고 싶음. - 이미경

* 책가방. 나의 동반자, 기쁨이었으니. - 황보선옥

* 책가방. 3년간의 손때가 묻었으며 기쁨의 결정체. - 손정미

* 동고동락의 책가방 임경숙, 임경숙

* 비록 고무냄새 나는 작업복이지만 사회 첫걸음의 이정표로서 더 오래 간직하고 싶음. - 임명자

* 책가방. 3년 동안 일하면서 배웠던 지식이 모두 담겨 있기 때문. - 문성님

* 당연히 책가방. 나의 발전을 상징하는 존재니까. - 지은화

삼화여상 소사(小史)

 

참고로 삼화여상이 언제 개교했는지, 언제까지 있었는지 등등의 역사를 간략하게 적는다. 이제는 추억으로 남은 학교가 되었어도 추억으로나마 온전히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삼화여상 동문회 자료집이 두툼해지는 데 미미하게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3. 1991년 삼화여상 신입생 모집 광고이해 입학한 학생은 삼화가 이듬해 폐업하면서 타 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삼화여상은 산업체 부설 야간 고등학교였다. 범표 고무신으로 국내 신발시장을 석권했던 주식회사 삼화가 설립했다. 19777월 정원 600명 규모의 정규 여자상업고교로 문교부 인가를 받아 이듬해 36일 두 학급 120명이 처음으로 입학했다. 1990년 입학한 250명이 졸업할 때까지 3천 명의 주경야독이 삼화여상을 거쳤다. 마지막 졸업 기수는 13회였다.

문교부 인가는 그렇고 실제론 1975년 문을 열었다. 그때는 교명이 삼화부설학교였다. 그해 12월 중학 과정 56명으로 출범했다. 이들은 일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일한다며 면학 의지를 다졌다. 이 학교는 부산진구 범천동에 있던 삼화 범일공장 정문 바로 앞에 있었다. 매학기 입학 지원자가 늘어나자 범일동 조방으로 확장 이전했다.

삼화여상은 세 군데 있었다. 범일동과 거제동, 그리고 언양이었다. 삼화와 함께 그룹을 이루었던 조선견직 등의 부설 여상이 19837월 문교부령에 따라 삼화여상 분교로 병합된 까닭이었다. 삼화가 부도나기 2년 전인 1990년 그해만 해도 세 군데 학교 24학급, 학생 수는 1천여 명에 달했다. 삼화여상 초대 교장은 김관용, 2대 교장은 정봉기였다. 두 분 다 자상하고 주경야독학생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깊었다.

삼화여상 입학자격은 세 가지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자 또는 졸업 예정자 고교 입학자격 검정시험 합격자 또는 문교부장관이 인정한 자 산업체 근무가 가능자 자였다. 3년간 공납금은 전액 면제했으며 회사 기숙사를 제공했다.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