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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⑥ 국제상사
작성일 2021-10-08 조회수 1857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⑥ 국제상사

2021-10-08 1857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국제상사

 

범일동에서 출발해 사상에서 훨훨 날다 

 

  국제상사는 사상공단에 있었다. 낙동강 괘법동 강변이었다. 지금은 르네시떼와 홈플러스, 한신아파트가 들어섰다. 국제상사는 1985년 국제그룹이 졸지에 공중 분해되기 이전만 해도 신발업계 최강자였다. 동양고무의 월드컵·프로월드컵과 함께 스펙스·프로스펙스로 국내 중·고가 신발 시장을 석권했다. 

  국제상사는 애초 동구 범일동에 있었다. 부산진시장 근처 철로가에서 ‘국제고무공업사’란 상호로 1948년 1월 창업했다. 창업주 양정모(1921∼2009)는 동래초등학교, 부산공립공업학교 출신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상호에 ‘공업’을 붙인 데서 공업학교 출신자의 면모가 엿보인다. 

  아버지 양태진은 만류일흥업(滿留一興業)이란 정미소 사장이었다. ‘아들 입에서 고무신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눈에 쌍심지를 켰다가 고개를 틀고’ 나갔을 정도로 고무신 사업에 반대했다. “고무공장에 미쳐 버렸나!” 소리까지 했다. 내심 정미소를 물려받길 바랐다. 

  그러나 장남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이제나저제나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었다. 반신반의하면서 ‘정미소 뒤켠의 불탄 자리’를 공장 대지로 내주었다. 공장 건물은 육촌 동생 양형모와 지었다. 시멘트와 벽돌이 귀한 시절이라서 지붕만 겨우 기와를 올리고 담벼락은 모두 나무판자로 둘러쳤다. 그렇게 해서 엉성하나마 150평 목조건물이 지어졌다. 1980년대 세계 신발의 전설 국제상사는 그렇게 시작했다.      

  1948년 4월께 첫 작품이 나왔다. 적대(赤大) 고무신 600족이었다. 33족은 ‘도저히 팔 수 없는 불량품이어서’ 나머지 567족만 팔았는데 한 사람이 몽땅 다 샀다. 충북 제천의 도매상 박두서는 부산에 왔다가 신규 고무신공장에서 첫 제품이 출하된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된다. 그는 범일동 여관에서 이틀을 기다린 뒤 몽땅 사서는 ‘륙색과 마대’에 담아 제천으로 돌아갔다.

  국제고무는 일취월장했고 승승장구했다. 타지 도매상이 이틀을 기다려 사 갈 정도로 고무신은 인기 상품이었다. 만드는 족족 팔렸다. 판매상의 주문량을 채우지 못해 쩔쩔맬 정도였다. 1949년 12월 법인체로 출범하면서 상호를 국제화학(주)으로 바꾸었다. 정미소는 146평에서 93평으로 줄이고 공장 건물을 1공장, 2공장으로 증축했다. 

  한국전쟁은 국제고무에 승천의 날개를 달아 주었다. 군수공장으로 지정되면서 공장 바깥에도 건물을 지을 정도로 사세가 급상승했다. 정문 건너편에 건물을 지어 기존 본공장 지역을 북공장, 건너편 지역을 남공장이라 불렀다. 이제 국제고무는 더는 ‘정미소 뒤켠 고무신공장’이 아니었고 창업주 양정모는 더는 ‘정미소 사장 아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였다. 1960년대 들어 국제는 두 번의 악몽을 겪는다. 첫 번째는 1960년 3월 2일 제2공장의 대화재 참사였다. 신입 여공의 성냥 장난질이 대형 화재로 이어지면서 인명과 재산 피해가 엄청났다. 국민가수 남인수가 부른 ‘400환의 인생 비극’은 그때의 아픔을 담았다. 

  두 번째 악몽은 ‘진양화학 분가’였다. 1962년 한국 신발은 드디어 한국이란 벽을 넘었다. 그해 처음으로 수출이 이뤄져 세계 시장에 진출했다. 태화가 장화 12만8,000켤레 12만 달러어치를 미국에 수출했고 이어서 국제도 창업 이후 최초로 23만 달러를 수출했다. 수출에 자신감이 붙고 해외시장의 가능성에 눈을 뜬 국제는 1963년 부산진구 부암동에 수출 전문회사 진양화학을 설립했다. 국제로선 첫 관계회사였다. 

  아버지 양태진은 수출 전문회사 설립에 소극적이었다. ‘수출 공장 다 지어놓고 코쟁이들이 안 사 가면 폭삭 망한다’라는 논리였다. 양정모는 밀어붙였고 결국 성사했다. 진양화학은 상호부터 수출 전문기업다웠다. 진양(進洋)은 해양 저쪽으로 나아간다는 포부의 표현이었으며 다른 기업은 상호에 ‘고무’가 붙었지만 진양은 당시로선 첨단 이미지인 ‘화학’을 붙였다. 시설도 그랬다. 동종 타사는 엄두도 못 내던 컨베이어 시스템을 도입해 생산성 극대화에 나섰다. 

  진양화학 분가는 1969년 3월 이뤄졌다. 재산 역시 분할됐다. 양정모로선 청천벽력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 양태진 국제화학 사장의 결정이었다. 국제화학은 장남 양정모 전무의 소유로 하고 진양화학은 양정모 이복동생 양규모의 소유로 결정 났다. 실상은 결별이었다. 1968년 5월 아버지는 회장으로 승진하는 대신 진양화학에 전념했고 양정모는 사장으로 승진해 국제화학에 전념했다. 

  ‘양정모 사장 시대.’ 진양화학 분가는 역설적으로 국제가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주춧돌로 작용했다. 아버지의 간섭 없이 독자 경영이 가능한 ‘양정모 시대를 열어갈 수 있었다. 수출시장의 전망을 밝게 봐 진양화학 창업을 주도했던 양정모는 수출 전문기업의 야망을 다시금 담금질했다. 진양화학보다 ’더 크고 더 최신의 공장‘ 프로젝트에 나섰다. 

  그래서 진출한 곳이 사상구 괘법동 낙동강 강변이었다. 해방 이전부터 거기 있던 신발 대기업 신라고무 대지와 건물을 모두 사들였다. 자그마치 6만 9천 평 공장이었다. 이 자리는 이후 사상공단의 핵으로 부상했다. 사상공단은 낙동강 동안(東岸) 저습지에 들어선 공업지역으로 1968년 1975년 준공했다. 막 착공하던 1968년 그해 사상 입주를 결정한 양정모의 남다른 경영 감각을 읽을 수 있다.

  1969년 3월 1일. 이날 사상 국제화학은 가동의 첫 단추를 눌렀다. 국제상사의 실질적인 첫날이 이날이었고 국제그룹의 실질적인 첫날이 이날이었다. 새로 들어선 제화공장과 기계공장, 제품공장은 멀리서 봐도 태가 났다. 낙동강 저습지라서 큰비가 오면 배꼽까지 차는 물바다를 헤치고 출근하는 게 고역이었지만 1975년 삼성, 대우, 쌍용 다음으로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되고 이듬해 그룹으로 나아간 국제의 신화는 1969년 3월 1일 그날 낙동강 강변에서 출발의 힘찬 뱃고동을 울렸다.    

 

  dgs1116@hanmail.net

 

 

  사진 설명

     

  

  * 사상공단에 있던 국제상사 전경. 동구 범일동에 있던 국제고무가 옮겨와 1969년 3월 1일부터 가동했다. 현재 르네시떼와 홈플러스, 한신아파트가 있다.    

 


 

  * 1961년 국제화학 왕자표 광고 달력. 모델이 당시 인기스타 태현실이다. 국제의 입지가 그만큼 대단했다. 

 

 

  * 1967년 부산산업전람박람회 진양화학 홍보탑. 국제와 진양이 분가하기 전이라 상호는 진양화학, 상표는 왕자표를 쓰고 있다.  

 

동길산 부산에서 태어나 초중고와 대학을 부산에서 나왔다학교 졸업 후 첫 직장이 부산진구에 있던 신발 대기업 삼화고무였다. 1989년 무크지 <지평>으로 등단했으며 <꽃이 지면 꽃만 슬프랴등의 시집과 한국 신발 100년사 <고무신에서 나이키까지등의 책을 냈다. 2020년 김민부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