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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④ 국제고무 대화재
작성일 2021-08-25 조회수 309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④ 국제고무 대화재

2021-08-25309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 

 

 남인수, 그날의 아픔을 노래하다  

 

동길산 시인

 

① 52명이 사망한 국제고무 대화재를 보도한 1960년 3월 3일 신문. ‘굴러 박히는 등 한때 아비규환’의 참상을 전한다. ⓒ부산시립박물관 소장

 

 ② ‘국민가수’ 남인수 애창곡집 LP. 남인수는 ‘400환의 인생 비극’을 불러 국제고무 화재로 생명을 잃은 어린 여공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부산시립박물관 소장 

 


 
③ 1950년대 고무신공장 여공의 작업 장면. ⓒ부산시립박물관 소장

 

  

  남인수는 ‘국민가수’였다. ‘이별의 부산정거장’ ‘무너진 사랑탑’ 같은 숱한 ‘국민가요’를 남겼다. 그가 부른 노래가 거의 다 그랬지만 특히 국민의 심금을 울린 노래가 있었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노래였다. ‘400환의 인생 비극’이란 노래였다. 1960년 발표했다. 제목이 너무 직설적이라는 이유로 나중에 ‘한 많은 네 청춘’으로 바뀐 이 노래의 1절은 다음과 같다. 

 

  열여덟 꽃봉오리, 열아홉 꽃봉오리

  눈물의 부산 처녀 고무공장 큰 애기야

  하루에 사백 환에 고달픈 품삯으로

  행복하겐 못 살아도 부모 공양 극진터니

  한 많은 네 청춘이 불꽃 속에 지단 말이냐.

 

  부산, 고무공장, 불꽃. 이 노래의 키워드다. 눈치 빠른 사람은 벌써 알아챘겠다. 그렇다. 이 노래는 부산 모 고무공장 화재로 생명을 잃은 여공들을 추모하는 진혼곡이었다. 사망자만 무려 52명. 대부분 어린 여공이었기에 국민적 분노와 안타까움을 일으켰다. ‘400환의 인생 비극’은 그러한 상황에서 나온 노래였다. 작사는 반야월 선생이 했다.    

  불은 국제고무에서 났다. 1960년 3월 2일이었다. 국제상사의 전신인 국제고무는 그때 범일동에 있었다. 부산진시장 맞은편 주차빌딩 일대가 거기였다. 발화점은 성냥이었다. 그때만 해도 일회용 라이터가 나오기 전이었고 일반 라이터는 고가품이라서 성냥이 일상적으로 쓰였다. 아무 데나 긁으면 불이 붙는 딱성냥은 인기 만점이었다.

  이필선은 입사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신참이었다. 나이는 스물여섯. 어린 여공이 태반인 현장에서 따돌림을 당했는지 아직 작업부서가 배당되지 않았는지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작업대 딱성냥을 발견하고선 장난삼아 켰다. 본드, 가솔린, 시너를 비롯해 주변은 온통 인화물이었다. 옆에 있던 여공이 놀라서 제지하자 엉겁결에 딱성냥을 내다 버린 곳이 하필이면 기름통이었다. 이필선은 현장을 빠져나와 집에서 사흘간 숨어지내다 동부산경찰서 형사들에 검거됐다. 

  52명 사망, 39명 부상. 화재 다음 날 국제신문과 부산일보, 동아일보 등 유력 일간지가 대서특필한 대형화재였지만 시작은 여공의 성냥불 장난이었다. 어처구니없는 화재였다. 불이 난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두 군데뿐이었다. 일제히 계단으로 몰려들면서 굴러떨어지는 등 현장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신문은 ‘굴러 박히는 등 한때 아비규환’이란 부제를 달아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보도했다. 소방도로가 나 있지 않아 화재 진압이 어려웠던 점도 인명피해를 늘렸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또 있었다. 이로 인해 인명피해가 더 컸다. 작업장 관리인이 현장의 동요를 가라앉힌답시고, 그리고 불을 꺼야 한답시고 여공들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희생자 대부분은 노래 가사처럼 나이 스물도 채 안 된 ‘열여덟 꽃봉오리, 열아홉 꽃봉오리’ 어린 여공들. 각별하게 돌봐줘도 모자랄 여동생 같은 이들이 관리자의 판단 미숙과 의욕 과잉으로 사지에 내몰렸던 셈이다. 국민은 분노했고 내남없이 안타까워했다. 

  노래에 따르면 여공들이 받은 돈은 하루 400환. ‘고달픈 품삯’이라 했으니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리라. 1960년 400환은 그 가치가 얼마나 될까. 일가족 네 식구가 둘러앉아 쌀밥도 아닌 보리밥으로 배를 채우기에 딱 맞는 돈이었다. 월간 <현대문학> 1960년 3월호가 400환이었다. 지금 책값이 1만 원이니 종일 일해서 받은 돈이 지금 돈으로 1만 원이었다.

  고무신공장은 화재가 잇따랐다. 원부자재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전국의 고무공장이 다 모인 부산은 그래서 늘 화재에 취약했다. 경향신문이 1953년 12월 1일 보도한 고무공장 화재 기사의 제목이 ‘부산은 화마의 도시’였을 정도였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며 ‘행복하겐 못 살아도 부모 공양 극진’했던 그 시절의 어린 여공에게 우리가 진 빚은 두고두고 갚아도 다 갚지 못할 빚이다. ‘열여덟 꽃봉오리, 열아홉 꽃봉오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dgs1116@hanmail.net

 

 

 동길산   부산에서 태어나 초중고와 대학을 부산에서 나왔다. 학교 졸업 후 첫 직장이 부산진구에 있던 신발 대기업 삼화고무였다. 1989년 무크지 <지평>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여섯 권과 <고무신에서 나이키까지-부산진구 신발 이야기>, <100가지 서면 이야기>,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진구> 등의 책을 냈다. 현재 부산진구신문에 ‘부산진이야기’와 부산시보 다이내믹부산에 ‘부산 나들이’를 연재 중이다. 2020년 김민부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