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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무신의 추억
작성일 2024-04-11 조회수 60
고무신의 추억

2024-04-11 60


눈보라 비껴 나는 -()-()-()-()-/ 퍼뜩 차창(車窓)으로 스쳐가는 인정(人情)!/ 외딴집 섬돌에 놓인 하나 둘 세 켤레.’

 

현대시조의 개척자로 불린 장순하 시조시인의 대표작 고무신이다. 시각적 요소를 도입해 돋보인 이 시조는 고교 교과서에 실려 유명해졌다. 정읍 출신인 시인이 1960년대 중반 전주~군산 간 도로(전군가도)를 달리는 버스에서 차창 밖으로 스쳐간 어느 시골집 풍경을 붙잡아 그 정취를 표현한 작품이다. 시인은 한적한 시골집 섬돌에 놓인 세 켤레의 고무신을 통해 가족의 정, 인간미를 묘사했다.

 

고무신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0~70년대 널리 사랑받은 국민 신발이다. 당시 부잣집 자식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운동화가 고무신을 대체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다. 그로부터 반세기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무신은 일상에서 사라졌다. 물론 굳이 사용하고자 한다면 지금도 구입할 수는 있지만, 골동품 취급을 받은 지 오래다. 그렇게 시대의 흐름에 쓸려 잊혀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고무신의 생명력은 그 재질처럼 끈질겼다. ‘부정선거·금품선거의 대명사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선거철이면 어김없이 소환된다. ‘고무신 선거논란이다. 모든 게 귀했던 1960~70년대, 유권자들에게 막걸리와 고무신을 돌리면서 표심을 샀던 금품선거·관권선거를 이른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고 했다. 하지만 선거법은 예외다. 인간의 도덕·윤리의식과 상식만으로는 선거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 도덕과 상식의 잣대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도, 선거와 관련되면 위법이 되는 행위가 적지 않다. 과거 표심을 잡기 위해 돌렸던 막걸리가 교묘한 향응으로, 고무신이 돈봉투로 진화했다. 그래서 선거법도 더 엄격하고 까다로워졌다. 그러면서 대놓고 향응과 금품으로 표를 사는 행위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도 고무신 선거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후보들이 돈봉투 대신 선심성 퍼주기 공약을 남발하면서 고무신 선거의 부활이라는 비아냥이 나오고 있다. 재난지원금 등 선거 직전의 예산 퍼주기, 그리고 현금 뿌리기수준의 공약이 끊이지 않았다. 이번 총선에서도 매표성 포퓰리즘이 판을 친다. 막대한 예산이 들지만 재원확보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 시절 고무신 돌리기는 애교 수준이다.

 

선거판에 고무신이 등장한 지 반세기가 훌쩍 넘었다. 20세기 중반을 기억하는 세대에게 고무신은 아련한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정겨운 물건이다. 그런데 지금 그 고무신이 부정선거의 상징, 청산해야 할 과거의 대명사로만 회자된다. 장순하 시인이 애틋하게 묘사한 그 시절 고무신에 얽힌 삶의 애환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 안타깝다. 전쟁 이후 고단했던 서민들의 삶을 대변하는 시대의 상징물이다. 선거철이면 불쑥 불려나와 부정적 이미지로 덧칠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 김종표 논설위원

[2024-04-09 전북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