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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㉖ 한국과 나이키(2)
작성일 2022-12-09 조회수 990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㉖ 한국과 나이키(2)

2022-12-09 990


신발 이바구한국과 나이키(2)

 

삼화, 한국 최초로 나이키를 만들다

 

하루는 블루리본 스포츠의 필 나이트란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이름을 처음 듣는 군소업체였지요. 우리나라 신발 대기업은 관심을 주지 않던 보따리상 같은 곳이었어요. 전화가 와서는 다짜고짜 찾아오겠단 거예요.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성의를 보여야 하니 언제 어디서 만나자고 약속했지요. 그런 군소업체 전화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받으니 메모해 놓고 잊었나 봐요.”

 

1970년대 중후반 삼화 수출부장이었던 송승호 씨의 회고다. 현재 화가로 활동하는 송승호 씨는 부산경남지역 민방 KNN201611월 방영한 특집 다큐 한국신발사’(박준석 PD)에 출연해 나이키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했다. 부산경제진흥원 신발산업진흥센터가 후원한 KNN 특집 다큐는 SBS를 통해 전국에서 방영했다.

송 부장이 언급한 블루리본은 나이키의 모태였다. 필 나이트는 1963년 부친에게 빌린 돈 50달러로 얼떨결에 블루리본 스포츠를 창업했다. 필 나이트와 약속한 1974년 어느 여름날 송 부장은 김해공항으로 나갔다.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필 나이트를 만나러 나간 게 아니라 한국 신발회사가 신주처럼 떠받들던 CITC 조너스 센트 회장에게 눈도장 찍으러 나갔다. 센트 회장은 국제상사, 당시는 국제화학을 방문하려고 방한했지만 삼화 송 부장은 눈도장이라도 찍어서 다음을 기약하자는 요량이었다.

 

공항에 가서 인사만 하고 돌아오려니까 좀 허전해서 공항 커피숍에 들렀지요. 커피를 마시는데 누가 등을 툭 치는 거예요. ‘자기가 필 나이트인데 비행기가 늦어서 오래 기다렸지?’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아차, 이 사람과 약속했지퍼뜩 생각나더라고요.”

 

첫 주문량은 러닝화 3천 족. 그 시절 우리나라 신발 대기업 주문 물량은 3, 5만 족이 기본이었다. 신발의 형태에 맞춰 금형을 만들어야 하고 신발 박스 같은 경우도 일정 물량 이상 되어야 인쇄했다. 필 나이트 주문 물량은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송 이사는 필 나이트 사장의 진정성과 열의에 믿음이 갔다. 생산담당 상무의 반대를 다독여서 3천 족 물량을 소화했다.

나이키가 삼화의 문을 두드린 건 CITC 때문이었다. 당시 부산의 큰 업체로선 삼화만이 CITC와 거래하지 않았다. CITC 눈치를 보지 않고 나이키의 주문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삼화는 이 무렵 종합무역상사로 발돋움해 자금도 여력이 있었다. 앞으로의 장래를 내다보고 나이키와의 관계 정립에 나섰다.

 

 

* 삼화 생산현장을 방문한 나이키 임원. 삼화는 1974년 한국 최초로 나이키를 생산했다. 창업주 필 나이트가 삼화를 방문해 러닝화 시제품 3천 족을 주문했다. 1976년에는 서울의 삼양통상, 1979년 하반기에는 동양고무의 풍영화성과 손잡았다. 동길산

 

첫 주문 3천 족은 조깅화 시제품이었다. 시제품 개발 등 우여곡절 끝에 나이키는 1977년부터 삼화에서 본격 수입했다. 삼화의 수출실적은 19771465천 달러(207천 족)를 시작으로 197816백만 달러(320만 족), 197949백만 달러(830만 족), 198053백만 달러(870만 족)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나이키와 삼화는 5년 독점계약을 맺었다. 이 기간인 1976년 회사 명칭을 블루리본 스포츠에서 나이키로 바꾸었다.

나이키가 급성장하게 된 배경은 1974년부터 일기 시작한 조깅 붐이었다. 조깅 붐의 대중화와 브랜드 개발, 품질 고급화, 스타 선수들을 앞세운 공격적인 홍보 등이 주효했다. 새로운 마케팅 전략을 도입하고 부단한 연구와 신제품 개발, 열린 마음은 나이키를 세계 최정상 브랜드로 이끌었다. 나이키 이전의 미국 신발시장은 아디다스와 퓨마가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었다.

한국산 나이키는 대성공이었다. 나이키 브랜드로 한국에서 주문한 운동화는 없어서 못 팔았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나이키는 197914천만 달러라는 경이적인 매출액을 달성했다. 품질도 덩달아 좋아져서 나이키의 품질이 아디다스보다 낫다고 했다. 탄력을 받은 나이키는 1979년 스포츠 의류 생산에 나섰다. 한국과 대만의 공장은 나날이 번창했고 영국과 아일랜드에 새로운 공장을 가동했다.

한국의 생산기지도 다변화했다. 판매량이 걷잡지 못할 정도로 급증하자 5년 독점계약을 맺은 삼화를 주 거래처로 하고 1976년 서울의 삼양통상, 1979년 하반기에는 풍영화성과 손잡았다. 부도가 났던 동양고무를 살린 풍영화성은 미국의 농구화 시장에서 나이키와 경쟁하던 컨버스(Converse)와 거래하고 있었다.

풍영화성은 부산진구 당감동 동양고무 안에 있었다. 주로 케미컬슈즈를 생산했다. 풍영화성도 위기를 맞았다. 미국 컨버스의 오더 감소로 생산라인 축소가 불가피했다. 그러던 차에 나이키는 제 발로 굴러온 호박 덩굴이었다. 풍영화성과 나이키의 제휴가 오늘날 화승의 원천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나이키는 2003년 컨버스를 인수했다.

 

 

* 1970년대 미국 컨버스(Converse) 농구화 광고. 컨버스는 2003년 나이키가 인수하기 이전까지 미국 농구화 시장에서 나이키와 경쟁했다.

 

풍영화성의 나이키 농구화는 출발이 순탄하진 않았다. 순탄하진 않았지만 한국 운동화가 한 단계 높아지는 디딤돌로 작용했다. 나이키가 수입한 한국산 농구화에 사달이 났다. 경기 도중 밑창이 떨어져 나갔다. 이는 역으로 작용했다. 풍영화성과 나이키는 품질 향상과 고급화에 박차를 가했다. 나이키와 한국 신발은 동반 성장하며 세계 운동화 고급화를 이끌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수출 품목은 캔버스화 위주에서 나일론 조깅화로 나아갔다.

1978년에 일어난 소재의 혁신도 신발 고급화의 주역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죽은 겉 부분만 사용하고 내피는 버렸다. 버리던 내피를 대전피혁이 개발, 운동화의 앞면과 뒷면에 부착했다. 제품이 질기고 모양이 좋았다. 고급스럽기도 했다. 신발의 고급화는 1980년대 대중적 인기로, 그리고 세계적 인기로 이어졌다.

공법도 현대화하였다. 밑창과 갑피를 따로 생산한 후 조립하는 현대식 신발제조 공법이 일반화되었다. 초대형 생산라인에 현대식 신발제조 공법까지 갖춘 한국의 신발제조 역량이 알려지면서 세계 각국 바이어는 한국을 더욱 중시했다. 한국에 우르르 몰려왔다. 이는 1980년대 한국 혁제 운동화가 세계 1위의 신기원을 이루는 자양분이 되었다.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