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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㉓ 고무신의 노래
작성일 2022-10-29 조회수 476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㉓ 고무신의 노래

2022-10-29 476


신발이바구고무신의 노래

 

동시대 아이콘이면서 고단한 마음 다독여

 

고무신은 반세기 넘게 한국 사회의 아이콘이었다. 일제강점기 1920년대부터 대망의 1980년대 이전까지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신발이 고무신이었다. 연세 지긋한 분이라면 고무신에 얽힌 추억담 서넛은 갖고들 있다. 추억담을 꺼내기 시작하면 마주 앉은 이도, 옆에 앉은 이도 한마디씩 보태곤 한다.

대중가요는 시대의 아이콘에 민감한 장르. 그러기에 고무신의 노래는 차고 넘쳤다. 일제강점기부터 2000년대 최근까지 숱한 고무신 노래가 나왔다. 고무신이 조선의 주력 산업이면서 현재진행형이던 일제강점기 그때는 신랄한 야유와 풍자의 노래가 나왔으며 1960년대와 70년대는 고무신에 얽힌 당대의 애환이,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는 연세 지긋한 분의 감성을 자극하는 노래가 주류를 이뤘다.

 

고무공장 큰 굴뚝 거짓말쟁이

뛰 하고 고동은 불어 놓고는

우리 엄만 아직도 보내지 않고

시치미를 뚝 떼고 내만 피지요.

- 한태천, 공장굴뚝(1930)

 

이른 새벽 통근차 고동 소리에

고무공장 큰아기 벤또밥 싼다.

하루 종일 쭈그리고 신발 붙일 제

얼굴 예쁜 색시라야 예쁘게 붙인다나.

감독 앞에 해죽해죽 아양이 밑천

고무공장 큰아기 세루치마는

감독나리 사다 준 선물이라나.

- 고무공장 큰아기(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그때는 고무신공장이 수건공장과 함께 인기직종이었다. 여성에겐 더욱 그랬다. 그 이전까진 여성에게 직장다운 직장이 없었다. 바느질이나 물레질, 대갓집 잔칫날 허드렛일, 멸치잡이 배가 들어오면 잔일 거들고 멸치 좀 얻는 일 따위가 고작이었다. 주막집 주모 또는 오일장 장사치로도 나섰지만 여성을 직업인, 또는 경영인으로 인정하는 건 많은 세월이 지난 뒤였다.

고무신공장 여성은 당시로선 모던 걸이었다. 여성이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그 자체가 획기적인 일이었다. 일하려는 여성은 넘쳐나고 자리는 비좁다 보니 근무 환경은 열악한 편이었다. 야간작업, 소위 잔업이 일상이었다. 노동력 과잉은 안 그래도 쥐꼬리 임금을 더 가늘고 짧게 했고 그마저도 지급을 미뤘다. 반장이나 감독이 시급을 자의적으로 책정하다 보니 불미스런 일도 곧잘 생겼다. 고무신 반출을 검색한다며 퇴근하는 여성의 몸을 더듬기도 했다.

열여덟 꽃봉오리 열아홉 꽃봉오리

눈물의 부산 처녀 고무 공장 큰 애기야

하로에 사백 환에 고달픈 품삯으로

행복하겐 못 살아도 부모 공양 극진터니

한 많은 네 청춘이 불꽃 속에 지단 말이냐.

- 남인수, 한 많은 네 청춘(1960)

 

국민가수 남인수가 부른 이 노래는 원래 제목이 ‘400환의 인생비극이었다. 국민감정을 건드린다는 이유로 한 많은 네 청춘으로 바꾸었다. 이 연재 네 번째 글 남인수, 그날의 아픔을 노래하다에서 밝혔지만 196032일 발생한 범일동 국제고무 화재를 모티브로 한 노래였다. 국제고무 화재는 시작은 밋밋햇지만 대형으로 번졌다. 52명의 어린 여공이 사망했다. 하루 일당 400환을 벌려고 젊은 나이에 산화한 누이들의 애환을 담은 이 노래는 당대의 심금을 울리는 진혼곡이었다.

 

<앞에 생략>

바람아 불어라 불고 불고 또 불어라

우리 아버지 명태잡이 내일이면 돌아온다

아이고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 좋아

 

명태를 잡아오면 명태국도 많이 먹고

명태국이 나는 좋아 아이고 좋아 기분이 좋아

 

명태국을 먹고 나서 명태가 몇 마리 남는다면

나머지 명태를 팔아서 고무신을 사서 신고

저 언덕 위에 있는 우리 촌색시 만나러 간다

아이고 좋아 기분이 좋아

<뒤에 생략>

- 한대수, 고무신(1975)

 

굽이굽이 고갯길을 다 지나서

돌다리를 쉬지 않고 다 지나서

행여나 잠들었을 돌이 생각에

눈에 뵈는 작은 들이 멀기만 한데

구불구불 비탈길을 다 지나서

소나기를 맞으면서 다 지나서

개구리 울음소리 돌이 생각에

품속에 고무신을 다시 보았네

허허허허 우리 돌이

우리 돌이 얼룩 고무신

허허허허 우리 돌이

우리 돌이 얼룩 고무신

우리 돌이 얼룩 고무신

- 둘다섯, 얼룩고무신(1978)

 

한대수 대표곡 고무신이 실린 레코드판(1975). 철조망에 걸린 고무신 재킷이 자아내는 무거운 분위기와는 달리 표제곡 고무신은 대단히 경쾌하다. ‘아이고 좋아, 기분이 좋아를 연발하게 된다.

 

1970년대 대중가요는 고무신을 희망과 긍정의 상징으로 변주한다. 지금의 장년과 노년층이 추억담으로 꺼내는 고무신 역시 이 무렵의 고무신이다. 고무신은 저 언덕 위에 있는 촌색시를 만나러가는 주단길이었으며 아들인지 조카인지 굽이굽이 고갯길을 다 지나고 구불구불 비탈길을 다 지나야 볼 수 있는 우리 돌이에게 줄 회심의 선물이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지금의 장년과 노년층은 고무신을 통해서 현실의 고단함을 견디고서 오늘보다 나은 내일로 나아갔다.

 

어머님 따라 고무신 사러 가면

멍멍개가 해를 좇던 날

길가에 민들레 머리 풀어 흔들면

내 마음도 따라 나간다.

잃어버릴라 닳아질세라

애가 타던 우리 어머니

꿈에서 깨어보니 아무도 없구나

세월만 휭휭

검정고무신 우리 어머니

 

보리쌀 한 말 이고 장에 가면

사오려나 검정고무신

밤이면 밤마다 머리맡에 두고

고이 포개서 잠이 들었네

잃어버릴라 닳아질세라

애가 타던 우리 어머니

꿈에서 깨어보니 아무도 없구나

가슴만 휭휭

검정고무신 우리 어머니

<뒤에 생략>

- 한동엽, 검정고무신(2010)

 

거제도 출신 한동엽은 일반에게 생소하다. 하지만 그쪽 세계에선 지명도가 꽤 높다. 그룹 블랙 이글스리더싱어 출신이다. 이산가족의 애환을 담은 휴전선아 말해다오를 불렀다. ‘보리쌀 한 말을 장에 가서 팔아야 고무신을 살 수 있을 만큼 고단한 시절이었어도 돌이켜보면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는 있다!

그랬다. 시대에 따라서 이렇게도 변주되고 저렇게도 변주됐지만 고무신은 동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고단하고 지친 마음을 다독이는 위안이기도 했다. 둘러앉아 또는 마주앉아 고무신의 노래를 부르던 시절. 가사를 자세히는 몰라도 고무신구절에 이르면 다들 마음이 하나가 되던 그 시절이 새삼 그립다.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