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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㉑ 당감동 동양고무 통닭골목
작성일 2022-09-27 조회수 983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㉑ 당감동 동양고무 통닭골목

2022-09-27 983


신발 이바구당감동 동양고무 통닭골목

 

신발의 세계 챔피언, 여기서 회포를 풀다

 

동양고무는 화승그룹 전신이다. 동양고무에서 오늘날 글로벌 화승의 신화가 태동했다. 동양고무는 한국전쟁 피란기업이다. 창업주 현수명 삼형제가 서울에서 경영하다가 1950년 전쟁이 나자 이듬해 1·4후퇴 때 부산으로 왔다. 피란 오면서 갖고 온 기계로 초량시장에서 부산고등학교 가는 길목에 공장을 차렸다. 동구 초량동 132-4번지다. 지금은 초량 육거리로 불리는 그곳에서 150평 규모의 고무신 공장 동양고무공업사를 차렸다.

 

 

* 백양산에서 내려다본 1971년 동양고무(흰 선). 지금은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섰다. 부산진구청 제공.

 

피란 초창기 상표는 동자(東字)였다. 동양고무 동()을 상표로 내세웠다. 동양고무 대표상표 기차표는 1953년 정전 이후에 나왔다. 동양고무가 어떻게 해서 기차표를 썼는지는 기록이 없지만 부단하게 나아가는 기차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싶어서리라. 그런 것도 있고 장소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1950년대 초반 그때는 2층 이상 건물이 귀했다. 약간 고지대인 초량 육거리에선 경부선 기찻길이 훤히 내려다보였으리라. 뛰어난 품질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자 150평 공장이 협소해지면서 1963년 부산진구 당감동으로 이전했는데 거기서도 경부선 기찻길이 내려다보였다.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의도를 갖고 기찻길 보이는 곳을 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부산진구 부암동 500번지. 동양고무의 당감동 주소다. 부암동과 당감동은 엄연히 달라도 현장에 가보면 동양고무는 양쪽 경계에 발을 담갔다고 보면 된다. 당감동이 오래된 지명이고 입에 익어서 아무리 부암동 500번지라고 해도 토박이는 당감동, 당감동 그런다. 동양고무는 여기 철도청 대지 19천 평에 근로자 2천 명에 이르는 매머드 공장을 세웠다. 소위 부산진구 시대를 활짝 열었다.

 

월급날이면 미어터졌어요. 앉을 자리가 없어서 한 시간씩 기다리고 그랬어요. 골목 양쪽 통닭집 모두 그랬지요.”

 

동양고무 월급날은 매월 10. 부산의 신발 대기업은 대부분 그날이 월급날이었다. 월급날은 장날이었다. 회사 정문에서 길가를 따라 난전이 섰고 외상값을 받으러 식당 주인이 정문에 진을 쳤다. 빠듯한 월급에 당장 갚을 형편이 안 되면 밍기적대며 퇴근을 미루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그래도 정문을 나서는 순간 숨었던 주인이 나타나서 외상장부를 내밀었다.

통닭은 지금이나 그때나 부담이 덜한 안주였다. 지금 기준으로 2만 원 안팎이면 술안주가 됐으니 당시 임금이 적은 편에 들었던 신발 근로자가 선호했다. 월급날은 물론이고 어쩌다 열리는 회식 역시 통닭을 안주로 할 때가 잦았다. 지금도 통닭골목에서 영업하는 희자통탉 주인 아주머니 말대로 한 시간씩 기다릴 정도로 찾는 사람이 넘쳐나니 한집 두집 통닭집이 늘었고 마침내 골목 양쪽에 즐비했으니 거기가 당감동 통닭골목이었다.

 


 
* 당감동 동양고무 통닭골목 전경. 동양고무가 잘나가던 1980년대는 골목 양쪽 20군데 넘던 통닭가게가 지금은 달랑 두 군데만 남았다.

 

통닭골목 전성기는 1980년대였다. 신발이 절정이었고 절정에서도 절정에 올라선 동양고무가 화승으로 상호를 변경하던 때였다. 골목 양쪽 스무 군데 넘는 통닭가게가 성업했다. 손님은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다락방까지 그득 찼다. 기다리다 지친 손님은 한 블록 아래 당감시장으로 몰려갔고 덩달아 당감시장도 호황을 누렸다. 

10년 전부터 슬슬 빠지더니 지금은 달랑 둘만 남았어요. 우리하고 저 앞에 팔복통닭.”

 

신발이 그랬듯 통닭골목 역시 도도한 물길을 거스를 순 없었다. 신발이 굴뚝산업으로 치부되고 외곽으로 밀려나면서 동양고무 역시 1993년 외곽으로 이전했다. 동양고무 자리엔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섰다. 동양고무가 옮겨가면서 통닭골목은 유탄을 맞았다. 월급날이면 미어터지던 통닭가게는 썰렁해지고 연세 지긋한 토박이가 이따금 찾는 정도다. 명성은 여전하지만 그 옛날에 비할 바는 아니다.

통닭골목 통닭가게는 현재 달랑 둘. 골목 이쪽에 희자통닭이 있고 골목 저쪽에 팔복통닭이 있다. 골목 양쪽 즐비했던 통닭가게는 구제품 가게로, 메뉴가 다른 식당으로 전업했다. 동전 하나도 아껴 쓰고 모아 쓰던 공돌이·공순이였지만 신발 만드는 실력만큼은 세계 챔피언이던 동양고무 근로자, 그들의 애환이 서리서리 서린 곳이 당감동 동양고무 통닭골목이었다.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