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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⑳ 동천과 신발❷
작성일 2022-07-08 조회수 706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⑳ 동천과 신발❷

2022-07-08 706


신발 이바구동천과 신발

 

부산특별시 승격운동과 10대 구상

 

동천 복원 노력은 광복 직후에도 있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서울이 정치수도를 명분으로 내세워 서울특별시로 승격하자 큰 기업이 많았던 부산은 경제수도와 해양수도를 명분으로 내세워 부산특별시 승격운동을 벌였다. 이때 이미 해양수도란 개념이 등장했다. 승격운동은 시민과 상공계, 관이 똘똘 뭉쳐 전개한 범시민운동이었다. 부산이 왜 특별시가 되어야 하는지 논거를 들었고 논거 중의 하나가 동천이었다.

승격운동의 중심에는 부산상공회의소가 있었다. 경제수도를 명분으로 내세우다 보니 상공계가 앞에 나섰다. 그때 부산상의 회장은 몇 년 후 삼화고무를 인수한 김지태였다. 김지태는 19467월 출범한 부산상의 초대 회장과 2대 회장을 지냈다. 그때는 회장을 회두(會頭)라고 했다. 부산상의가 주축이 되고 부산시 동사무소[그때는 동회(洞會)라고 했다] 연합회인 동련(洞聯)이 가세했다. 구제(區制)를 실시하기 이전이라 동회는 부산시 바로 아래 하부 조직이었다.

승격운동은 두 단계로 나눠서 벌어졌다. 첫 번째는 1946928, 두 번째는 19496월 벌어졌다. 첫 번째는 경제와 해양을 내세워 경상남도 예속에서 벗어나겠다는 명분은 좋았지만 중앙에서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부산상의 주도 승격운동의 한계였다. 이를 경험 삼아서 두 번째는 범시민운동으로 전개했다. 국회의원과 지역 명사, 부산상의와 동회연합회가 주축이 되어 조직한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가 중심에 섰다.

()부산 건설 10대 구상. 아무런 구호도 없이 특별시 승격만을 외칠 순 없었다. 그래서 내세운 게 10가지 구상이었다. 동천 하구에 있는 대선양조장에서 서면까지 운하를 건설하고 낙동강 강물을 끌어들이겠다는 구상을 비롯해 열 가지에 이르는 구상은 하나하나 획기적이었다. 일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특별시 승격 명분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도 특별시 승격은 무위에 그쳤다. 1948년 출범한 제헌국회에 상정까지 되었지만 부결되고 말았다. 특별시를 두 군데 둘 수 없다며 서울시가 국회의원을 움직였고 경제도시로서 거둬들이는 세금이 지대했던 경남도가 조직적으로 반대했다. 문제는 국회였다. 국회에서 가결하면 만사 오케이상황이었다. 이는 김지태가 국회로 진출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1950530일 제2대 총선에서 김지태는 당선했고 부산특별시 승격운동은 국회 차원에서 다뤄지게 되었다.

초반 분위기는 좋았다. 서면을 주요 근거지로 하는 부산 갑구 총선에서 김지태가 당선하면서 부산특별시승격안은 탄력을 받았다. 부산 국회의원이 다섯 명뿐이던 시절이었다. 총선 후 25일 만에 발발한 한국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옮긴 임시수도 국회에 승격안이 상정되었다. 물심양면으로 김지태의 도움을 받은 피란 국회의원이 동조했고 여론은 호의적이었다.

 

 

* 1952년 전포천 주변의 피란민 수상가옥. 광복 직후 동천을 중심으로 부산을 특별시로 승격시키겠다는 구상은 동천이 피란민 거주지가 되면서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제공. 

 

이런 문제는 동란 와중에 논의할 것이 아니라 환도하여 정국이 안정된 뒤에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

 

서울시와 경남도의 반대는 집요했다. 이승만 대통령까지 움직였다. 대통령의 환도 후 처리라는 한마디는 승격운동 열기에 얼음물을 퍼부었다. 동천도 경우가 딱했다. 동천 이쪽저쪽 천변에 피란민 판잣집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오갈 데 없는 피란민이었다. 동천을 운하로 개발하려면 그들을 내쳐야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부산특별시 승격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될 듯 될 듯 안 됐다. 경남도와 서울시가 조직적이면서 적극적인 반대를 펼쳤다. 경남도는 부산이 분리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서울시는 부산이 승격되면 서울특별시 위상 저하를 우려했다. 결국 1963년 부산직할시 승격으로 만족해야 했다.

* 1950년대 서면로터리 일대의 한국전쟁 포로수용소. 수용소에서 배출한 오·폐수는 동천 오염의 한 원인이 되었다. 부산시청 제공. 

 

대부산 건설 10대 구상은 지금도 곱씹을 만하다. 그 시절에 어찌 이런 구상을 했을까 싶을 정도다. 동천 외에도 부산역을 서면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를 해안상가로 개발하자는 구상 등은 지금도 유효해 보인다. 부산특별시승격운동이 벌어지던 1950년 무렵이면 지금부터 70년 전. 70년 전에 이런 구상을 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그 시절 특별시 승격운동을 벌인 부산시민 모두에게 경하의 박수를 보내며 10대 구상 전부를 소개한다.

 

부산역을 서면으로 이전하고 동시에 조차장을 가야 방면으로 옮긴다.

부산항을 근대적 항만시설로 갖추고 특히 적기방면을 개발하여 또 하나의 외항을 만든다.

부산중앙역(서면)과 연결하는 임항(臨港)철도[서면적기, 산 밑을 통과]를 부설하여 별도계획의 운하와 더불어 육해수송 능력을 강화한다.

범일동에 있는 동천 부지를 이용, 운하[서면대선양조장 간]를 개설하고 낙동강 물을 끌어들여 공업용수를 해결한다.(당시 대선양조장은 문현동에 있었음=글쓴이)

현재의 부산역(초량으로 이전하기 전의 본역) 및 조차장을 철거하는 데서 생기는 넓은 땅을 국내 유일의 해안상가로 개발한다.

서면을 중심한 거제 연산 해운대 송도를 고급주택지역으로 설정한다.

지하철도(서면시청 앞)를 기간 교통수단으로 설정하고 동래 해운대 등의 풍치지(風致地)는 관광지대로 개발하여 전철을 운행한다.

전신 전화 전기 등의 지상의 전주들을 지하 케이블화하고 고가도로를 만들어 교통을 스피드 업 하는 동시에 시가지의 모든 차단 장애물을 제거한다.

김해군 대저면에 국제공항을 건설한다.

세계의 대도시들이 하천을 끼고 발전한 사례를 본받아 낙동강 연안인 구포 김해 대저 일대가 부산시로 편입되어야 한다.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