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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⑱ 진양화학
작성일 2022-05-27 조회수 1073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⑱ 진양화학

2022-05-27 1073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진양화학

 

진양고무아닌 진양화학

 

진양고무가 맞는 것 아닙니까?” 1980년대 신발회사에 다녔던 이력 덕분에 신발에 관련한 글 청탁을 더러 받는다. 원고를 보내면 대개는 별다른 지적 없이 넘어가는데 진양화학은 좀 예외다. ‘진양화학이 아니고 진양고무아니냐는 지적이다.

이유 있는 지적이다. 진양화학이 성업하던 시절 대부분의 신발회사는 상호 다음에 고무를 넣었다. 삼화고무가 그랬고 태화고무, 동양고무 등등이 그랬다. 그렇지만 유독 진양은 창업할 때부터 화학을 고수했다. 진양화학을 설립했던 국제고무도 상호에서 고무를 떼어내고 화학을 붙여 국제화학이라 했다. 국제고무와 국제상사 사이에 국제화학이 있었다.

고무와 화학은 차이가 뭘까. 기술적으론 별 차이가 없었다. 상호에 고무를 붙인 회사도 화학을 이용해 신발을 제조했으니 차이가 있을 리가 없었다. 단지 있어 보였다. 일제강점기부터 써오던 고무는 어딘지 구닥다리 같고 케케묵은 냄새가 났다. 그에 견주면 화학은 모던해 보였고, 있어 보였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진양과 국제의 실질적인 창업주인 양정모의 전공과 연관이 있었다. 양정모는 부산공업학교 출신이었다. 화학이니 공업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범일동에 창립한 고무신 공장 명칭에도 공업이 들어가 국제고무공업사였다. 19484월께 본격적인 영업에 들어갔다.

상호에 화학들어간 건 2년 뒤였다. 국제고무공업소를 주식회사로 확대하면서 새로운 법인을 설립했다. 새로운 법인의 명칭이 국제화학주식회사였다. 청년 양정모가 품었던 화학 입국이 마침내 본궤도에 들어섰다. 화학 관련 고등교육을 받은 양정모의 진두지휘로 국제는 일신우일신, 월신우월신, 연신우연신 했다. 대화재 같은 우여곡절도 겪었지만 자동제화기 등으로 정상의 반열에 들었고 1962년 태화에 이어 마침내 신발 수출기업의 영예를 안았다. 그해 9월 미국에 농구화 2,424족을 수출한 데 이어 12월 다시 43,392족 수출에 성공했다. 미국 시장의 반응이 좋았다.

 


진양화학의 도날드 케미슈즈 광고수출 전문기업으로 출범했던 진양은 상호에 고무를 썼던 동종 타사와 달리 화학을 표방했다. 1963년 설립 당시엔 부산 최고의 최신식 회사였다. 

 

진양화학은 수출기업 국제의 자신감의 발로였다. 미국 거대시장에서 가능성을 읽은 양정모는 아버지 양태진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출용 생산공장을 부산진구 부암동 6,363평 대지에 새로 지었다. 상호는 국제처럼 화학을 넣었다. 그게 1963년 설립한 진양화학주식회사였다. 부산에서 화학을 상호로 쓴 신발 대기업은 국제와 진양 두 군데뿐이었다. 오리표 신발로 드날린 동신화학은 서울 기업이었다.

진양화학은 상호에서 수출 냄새가 물씬 났다. 진양(進洋). 바다로 나아간다는 뜻이었다. 단가가 낮은 신발을 비행기로 수출할 리는 만무였으니 바다는 수출에 나선 신발 기업에 기회의 땅이었다. 기회의 땅인 오대양 바다로 나아가 세계 시장을 석권하겠다는 웅혼한 기상이 서린 이름이 진양이었다.

수출기업답게 진양은 모든 게 최신식이었다. 건물은 새로 지었으니 말할 것도 없고 당시로선 첨단에 속했던 컨베이어 시스템을 도입했다. 내친김에 국제도 컨베이어를 도입하여 제조공정에 혁신을 기했다. 이로써 두 기업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일약 수출시장의 강자로 떠올랐다.

진양은 화학회사답게 신발만 하지 않았다. 비닐 제품도 같이 했다. 설립 초기 진양화학은 수출이 엉거주춤하면서 고전할 뻔했지만 제1차 경제개발계획 추진에 따른 비닐 제품의 국내 수요가 증가하면서 시장에 안착할 수 있었다. 더욱이 국제와 진양은 동일체였다. 설립자가 동일인이었고 경영진 역시 동일한 인맥이었다.

국제화학과 진양화학을 아주 분할해서 따로 운영하면 어떨까?”

 

호사다마였다. 국제와 진양, 잘 나가던 자매 기업은 궤도 전환의 파국을 맞아야 했다. 급기야 분할했다. 양정모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1967년 초겨울 양태진 사장은 양정모 전무를 불러서 분할을 권유했다. 사실상 강압이었다. 결국은 분할됐다. 모회사 국제는 양정모가 지분을 갖고 진양은 양정모의 이복동생 양규모가 경영을 맡았다.

19683월 두 회사는 완전히 분리했다. 재산은 나뉘었다. 그해 5월 두 회사의 회장으로 승진한 양태진은 실질적으로 진양의 경영에 전념했고 아버지의 사사건건 간섭에서 벗어난 양정모는 국제에 전념하며 양정모 사장 시대를 활짝 열어갔다.

진양화학. ‘진양화학한 단어로 읽어야 마땅하지만 나는 두 단어로 읽는다. ‘진양화학띄워서 읽으며 각각의 단어가 가진 의미를 음미한다. 오대양 육대주로 나아가려 했던 당대 신발인의 웅혼한 포부가 여기 담겼으며 첨단기법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자 했던 신발인의 가상한 기상이 여기 담겼다. 진양화학은 현재 부암동에 진양사거리란 이름으로 남았다. 진양화학 자리엔 신발 동상이 황금빛으로 빛난다.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