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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⑮ 보생고무
작성일 2022-02-17 조회수 1064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⑮ 보생고무

2022-02-17 1064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보생고무

 

타이야표검정 통고무신으로 전설이 되다


보생(寶生)고무. 신발회사 보생고무는 지금은 생소하지만 한때는 부산을 대표하고 한국을 대표하던 기업이었다. 부산시가 1962년부터 매년 발간한 <부산통계연감>에는 1960년대와 70년대 국제와 태화, 삼화, 진양, 동양과 함께 부산 주요 신발 기업의 선두그룹으로 나온다.

보생고무는 서면에 있었다. 서면로터리에서 가장 가까운 고무신공장이었다. 범내골 쪽에서 부산상고로 가는 길목 높다란 굴뚝이 보생고무였다. 그래서 부산상고 올드졸업생은 거의 보생고무를 기억한다. 보생고무 위풍당당한 건물과 보생고무에서 풍기던 고무 냄새까지.

보생고무는 부전천을 꼈다. 서면시장과 부산상고 사이로 흐르던 하천이 부전천이었다. 부산진구청이 2010년 펴낸 <옛 사진으로 보는 서면 이야기>에는 부전천을 낀 1960년 보생고무가 나온다. 삼각형 공장 지붕과 하늘에 닿을 듯 치솟은 굴뚝, 그리고 돌로 가지런히 쌓은 부전천 방죽은 서면에 저런 시절이 있었나?’ 감회에 젖게 한다.


 
* 1960년 보생고무 전경. 부산진구청이 2010년 펴낸 <옛 사진으로 보는 서면 이야기>에 실렸다.

 

 

* 1960년대 초반의 서면로터리 일대 전경. 오른쪽 상단에 굴뚝이 있는 보생고무가 보인다. <엣 사진으로 보는 서면 이야기> 150.

 

 

 

보생고무는 1937년 보생고무공업소로 출범했다. 1983년 폐업할 때까지 한국 신발 1세대로서 지역경제 견인과 한국경제 부흥이란 막중한 소임을 다했다. 한국전쟁 동란기에는 훈련화, 방한화, 통일화 같은 군수품 생산에 주력하면서 전쟁 승리에 힘을 보탰다. 1960년대는 아무리 오래 신어도 닳지 않는다는 통고무신으로 서민의 고단한 삶을 위무했다.

1960년대는 고무신의 춘추전국시대였다. 저마다 강점을 지닌 고무신이 군웅할거하며 전쟁 직후의 춥고 주린 시대를 다독였다. 당시 전국을 주름잡던 고무신 상표는 국제화학 왕자표, 태화고무 말표, 삼화고무 범표, 동양고무 기차표, 진양화학 진양, 그리고 보생고무 타이야표였다.

보생 타이야표. 보생 타이야표 고무신은 폐타이어를 재생한 고무신이었다. 타이야표 검정 통고무신은 1966년 나오자마자 이쪽 세계의 전설로 등극했다. 국민 고무신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못이나 철조망 같은 데 걸려 찢어질망정 절대 닳지 않는 신발이었다. 애착이 컸던 만큼 찢어져도 바로 버리지 않았다. 실로 기워 신었다. 흰 실로 기운 검정고무신은 그 시대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보생고무 타이어표 통고무신은 도시보다 시골에서 인기 짱이었다. 농부나 나무꾼, 소꼴 먹이는 초동이 애지중지했다. 저마다 목에 수건을 걸치고 밀짚모자나 농약 살 때 농약 판매점에서 서비스로 준 농약회사 이름이 적힌 모자, 더러는 새마을 운동 로고나 근면·협동 구호가 적힌 모자를 썼지만 신발은 대부분 보생고무 타이야표 검정고무신을 신었다. 질기고 오래 신었기에 내남없이 보생 타이야표 검정 통고무신을 선호했다.

 

* 보생 타이야표 검정 통고무신. 질겨서 오래 신는 것으로 유명했다. 못에 걸려 찢어지면 실로 기워서 신었다. 

 

여담으로 한마디 하자면 고무신에도 전략이 있었다. ‘고무신에 무슨 전략이?’ 싶겠지만 그건 지금 이야기고 고무신이 신발 시장의 주역이던 한 시대 전만 해도 고무신은 기획이며 디자인, 생산, 판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가 전략 덩어리였다. 대표적인 전략이 도시 고무신, 시골 고무신이었다,

도시와 시골은 무엇보다 길이 달랐다. 도시는 반듯하고 시골은 울퉁불퉁했다. 그런 차이에 착안해 도시와 시골을 구분한 고무신을 만들었다. 도시 고무신은 가볍고 날렵하게 해 멋을 내었다. 구두와 나란히 두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시골 고무신은 볼을 넓고 둔하게 하고 바닥을 질기고 두텁게 해 비포장 험한 길에서 오래 견디도록 했다.

 

어머니가 내 발보다 큰 신발을 사주셔서 제기차기하면서도 훌러덩 벗겨지고 고무공 차기를 하면 공보다도 더 멀리 날아가던 추억의 껌둥 고무신 - 김정식 카카오스토리

 

나는 1957년 정유생 닭띠다. 강냉이죽과 급식빵, 그리고 보생고무에서 만든 보생고무 타이어표 검정 통고무신의 추억을 가진 세대다. - 이월춘 시인

 

보생고무는 1983216일 폐업했다. 세계적인 경기침체, 원유가격 인상에 기인한 고유가로 휘청거렸다. 국내 경기 장기침체가 겹치면서 한국 신발 1세대 보생고무는 무너졌다. 장강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를 순 없었겠지만 몇 년 후 한국의 신발이 호황국면에 들어선 걸 생각하면 그때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보생고무는 나 여기 있었소라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하지만 기업명과 상표명은 지금도 건재한다. 인터넷에 보생고무를 검색하면 무수하게 뜨는 보생고무 타이어표 고무장갑이 빈자리, 허전한 마음을 달래준다. 질기고 오래 신어서 호가 났던 보생고무 타이야표 검정 통고무신의 전통을 타이어표 고무장갑이 이어 간다.

보생고무 자리는 부산진구 부전동 522번지. 현재 상업용 건물 효성엑센시티가 들어섰다. 복합상영관 메가박스며 백세주 마을이 입주한 11층짜리 빌딩이다. 쥬디스 태화 맞은편 금강제화 도로로 쭉 가면 보인다. 보생고무는 사라지고 공장 앞에 흐르던 부전천 역시 복개돼 옛 모습을 잃었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보생고무에 대한 기억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신발 1세대 보생고무와 보생인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