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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⑭ 1세대 위장취업자 허정숙
작성일 2022-02-03 조회수 939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⑭ 1세대 위장취업자 허정숙

2022-02-03 939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14-1세대 위장취업자 허정숙

 

일제강점기 부산의 고무공장 파업을 이끌다

 

위장취업은 1970년대와 80년대를 달구었던 키워드다. 그 시대를 대표하던 용어의 하나가 위장취업이다. 그 시대는 뜨거웠다. 배운 자는 배운 것을 감추고서 노동 현장에 투신했다. 노동자와 부대끼며 그들과 함께 오늘보다 나은 내일, 여기보다 나은 저기로 나아가려 했다. 그것이 한 시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위장취업이었다.

허정숙(19021991)1세대 위장 취업자였다. 금수저였지만 부산의 고무신공장에 취업했다. 그때가 1930년대 초였다. 부당 노동행위가 만연하던 일제강점기였다. 여공이 태반이던 고무·방직·제사·정미업은 부당행위가 일상이던 때였다. 고무신공장은 부당과 비정상이 거의 일상이었다. 경영주나 관리자는 임금을 조금 더 주고 덜 주고 하는 방식으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여공을 비일비재 농락했다. 불합리한 임금을 비롯해 폭행과 구타, 희롱, 심지어는 성폭력에 노출되었다.

이에 여성들은 투쟁에 나섰다. 봉건 허례 타파, 인신매매 금지, 공창 금지, 미성년 남녀의 결혼 금지, 여성 청소년에 대한 차별철폐 등 여성성에 자각을 바탕에 둔 투쟁은 시일이 지나면서 적극적으로 바뀌었고 조직화, 대중화되었다. 1920년대 투쟁이 작업장 탈주라는 소극적 방법을 택했다면 1930년대는 여성단체를 낀 노동운동으로 나아갔다. 진보 여성 위주의 활동가는 노동 현장에 취업해 노동자를 눈뜨게 했으며 파업을 이끌었다.

배운 여성허정숙도 활동가였다. 변호사 아버지를 둔 일본 유학파 신여성이었지만, 그래서 나 몰라라 넘어갔으면 만사가 편했겠지만 뜨거운 피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감옥에도 여러 번 갔다. 1929년과 1930년 체포되었고 19316월 광주학생운동 배후조종, 경성 항일 학생시위 주도, 조선공산당 재건 등의 혐의, 유언비어 날조와 선동 혐의 등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3233심 재판에서 집행유예 처분을 받고 가석방되었다.

허정숙은 출소하자 병원을 경영했다. 감옥에서 배운 의학지식으로 태양광선치료소를 운영했다. 그러다 19333월 병원을 다른 한의사에게 맡기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해 225일 여공 80명이 임금 인하 반대와 벌금제도 철폐를 요구하며 동맹파업에 나섰던 율전고무에 위장 취업했다.

허정숙은 429일부터 시작한 율전고무 2차 파업을 이끌었다. 그래도 월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자 55일 총파업을 주도하였다. 공장장 강원길이 강제로 끌어내자 실신하기도 했다. 총파업을 유도하려고 파견된 남성 운동가 2명은 체포되었으나 허정숙은 실신을 이유로 체포를 모면하였고 서울로 피신했다.

 

 

* 청계천에서 족욕하는 스물 살 전후의 세 여자.’ 왼쪽부터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다. 모두 단발머리다. 아직은 봉건적이던 그 시절, 이들의 단발머리는 그 자체로서 사회적·문화적 충격이었다.   

    

허정숙에 율전고무에 취업한 1933년은 연초부터 여성계 움직임이 심상찮았다. 그해 11일 민족지 동아일보에서 창간한 월간 여성지 신가정(新家庭)은 여성계의 심상찮은 움직임의 예고탄이었다. 12일 함북 성진 양말공장 파업을 시작으로 직종을 가리지 않고 파업이 연이었다. 13일은 서울 도로 공사장에서, 그다음 날은 진해 제사공장에서 임금 감하(減下) 반대 또는 노동시간 단축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고무신공장 파업은 한강 이남과 이북을 가리지 않고 동시다발 일어났다.

부산은 허정숙이 취업한 율전고무가 파업의 선두에 섰다. 부산은 일제강점기 대규모 여공 파업이 처음으로 일어난 곳이었다. 1922년 조선방직 여공 파업이 그것이었다. 조선방직은 1930년에도 총파업을 벌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고무신공장은 1929년 고무공장 여공 동맹파업, 1930년 환대(丸大)고무 파업, 1931년 희성(喜聲)고무 파업이 일어났다.

1933225. 1931년 희성고무 파업 이후 상대적으로 잠잠하던 부산의 노동계에 첫 불꽃을 쏘아 올린 날이었다. 그날 율전고무 여공 80명은 임금 인하 반대와 벌금제도 철폐를 요구하며 동맹파업에 나섰다. 벌금제도는 다양했다. 지각해도 벌금이었고 불량품이 나와도 벌금이었다. 429일에는 허정숙이 주도한 동맹파업이 일어났다. 이 파업은 5월에도 이어졌다. 율전고무 파업은 1933년 그해 부산을 뜨겁게 달구어 10월의 마지막 날까지 이어지는 고무공장 파업의 도화선이 되었다. 다음은 율전고무 파업이 도화선이 된 1933년 부산의 고무공장 파업 일지다.

82일 환대고무 직공 300, 임금인상 요구 파업. 813일 환대고무 직공 300, 임금인상 요구 재파업. 1018일 대화(大和), 일영(日榮), 능암(菱岩)고무 여공, 임금 감하로 동맹파업. 환대고무 직공 300, 임금인상 요구 재파업. 1020일 희성고무, 율전고무 직공, 임금 인하 반대 동맹파업. 1029일 고무공장 총파업, 일성(一成). 환대고무 동조 파업. 1030일 평양 대동고무, 세창고무에선 검사원 불신임과 임금 인하 반대 동맹파업을 벌였으며 부산에선 대화, 일영고무 등 7개 공장 노동자 총파업.

허정숙은 일제강점기 조선을 대표하던 여성이었다. 일제강점기 김병로, 이인과 함께 3대 인권변호사로 불리던 허헌의 딸이었으며 그 자신 주세죽, 고명자와 함께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여성해방 운동가로 불린다.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였던 조선희는 이들 세 명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소설 <세 여자 1·2>를 펴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이들 한 명 한 명, 뜨거운 생애가 나온다. 1930년대 부산을 뜨겁게 달구었던 위장 취업 1세대 허정숙, 부산이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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