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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⑫ 고무신 디자인 변천사
작성일 2022-01-07 조회수 859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⑫ 고무신 디자인 변천사

2022-01-07 859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12 고무신 디자인 변천사 

 

고무신, 디자인 혁신으로 조선의 신발로 등극하다

 

초창기 고무신은 어떻게 생겼을까. 어떻게 생겼다가 어떻게 변했을까. 초창기 고무신은 모두 일본 제품이었다. 유학생이 귀국하면서 선물로 가져오거나 판매상이나 행상이 일본에서 수입, 또는 우편주문해서 팔았다. 한국 최초의 고무신공장 대륙고무조차도 1919년 설립 이후 몇 년간은 일본 제품을 수입해 팔았다. ‘제조원(製造元)’1921년 주식회사 발족 이후의 일이다.

초창기 일본 고무신은 투박한 장화 같았다. 그러다 일본식 짚신 조리[초리(草履)]를 모방했다. 일본식 짚신 조리의 바닥을 고무로 만들고 끈을 달아 발가락 사이에 끼워서 신는 고무신이었다. 조리는 한자에서 보듯 풀로 엮은 샌들쯤 된다. 우리가 흔히 게다짝으로 부르는 게다는 끈을 다는 것은 같지만 바닥이 나무다.

평양고무와 이병두. 초창기 고무신에 획기적인 변화를 몰고 온 주역은 평양 최초의 고무공장을 설립한 이병두였다. 1919년 대륙고무와 같은 해 몇 달 늦게 평양에서 출범한 이병두의 고무공장은 고무신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한 방에 바꿨다. 1910년대 고무신은 인기가 없었다. 샌들도 아니고 구두도 아니면서 왜색을 팍팍 드러냈다. 일본에 반감이 큰 보통의 조선인은 반길 리가 없었다.

고무신에 대한 인식을 바꾼 이가 이병두였다. 그때가 1920년 봄이었다. 그는 고무신을 남녀롤 분리하고 최초로 디자인 개념을 고무신에 도입했다. 짚신 뒷부분을 남자 고무신에, 코신을 여자 고무신에 적용해 가장 조선적이면서 가장 현대적인 고무신을 시장에 내놓았다. 외코신을 내놓아 조선의 여심(女心)을 사로잡은 천재 디자이너가 이병두였다.

이병두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평남 덕천에서 흙수저로 태어나 잡역부로 살았다. 병원 잡역부로 일할 때 평양 갑부 최형준의 아들인 최규봉을 만났다. 장기간 입원해 있던 최규봉과 친목을 쌓았고 그의 지원으로 고무신 행상에 나섰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나이토쿠[내덕(內德)]상점 인기 품목이 고무신이었다. 처음엔 소량을 우편 주문하는 직구행상이었다가 자신감이 생기자 고무화전문점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나섰다.

 

 

* 일제강점기 육합표 고무신 광고. 광고 왼쪽 아래가 남자 고무신이고 오른쪽 아래가 여자 고무신이다. 질기고 모양 좋고 값 싼 것을 내세운다.

  

직구에서 생긴 자신감은 직접 생산으로 이어졌다. 이병두는 일본으로 건너가 제조 공정과 고무배합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한국 최초의 고무배합 기술자가 이병두였다. 기계와 원료를 구입해 귀국한 그는 최규봉 등과 평양에 평양 최초의 고무공장을 세우고 기술적인 부분을 전담했다. 판매점에 불과하던 나이토쿠도 공장을 지어 직접 생산에 나섰다. 두 공장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이병두는 디자인에 일대 혁신을 꾀했고 그게 남자는 짚신형 고무신, 여자는 외코 고무신이었다. 고무신이 조선의 신발로 등극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대륙고무 출범과 이병두 고무공장의 성공으로 후발 주자가 잇달아 등장했다. 1920년 조선고무가 함남 원산에 들어섰고 1921년부터 서울에선 한성고무, 서울고무, 반도고무, 경성고무, 대창고무, 중앙상공, 조선고무, 조일고무 등이, 부산에선 선만고무, 일영고무 등이, 평양에선 서선(西鮮)고무 동아고무, 정창(正昌)고무 등이 들어섰다. 일본산 수입 고무신은 명함도 내놓지 못할 정도로 토종 고무신이 조선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무신 디자인도 일신우일신했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품질이든 가격이든 뭐든 우위에 있어야 했고 디자인 역시 뭔가 남달라야 했다. 짚신 같은 재래의 신보다 질기고 가벼우며 방수가 잘 되는 장점에 더해 사람의 마음에 쏙 안기는 톡톡 튀는 디자인을 고민했다. 바닥만 고무로 만들고 겉돌이는 고무 대신 가죽이나 베로 만든 편리화나 경제화, 경편화(經便靴)가 유행하던 시절도 있었다,

호시절을 구가하던 고무신도 암흑기가 있었다. 디자인 역시 침체됐다. 1930년대 중반 이후였다 일본이 중국에 침범하고 미국에 전쟁을 걸면서 고무가 군수품으로 지정된 탓이었다. 고무 보급을 통제하면서 고무신 역시 뒷전으로 밀려났다. 한해살이풀 왕골로 만든 여성 고려화(高麗靴)’가 나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19605·16도 고무신 역사에선 악몽이었다. 군사정부가 신생활복을 권장하고 양장이 일상화되면서 구두를 신는 이가 늘어났다. 서민층에선 여전히 고무신이 일상화였지만 정책 순위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이후 구두와 케미화, 운동화 등이 고무신을 서서히 밀어내면서 신발 시장의 판도가 바뀌었다.

 

 

* 일제강점기 편리화 고무신 광고. 굽이 구두처럼 높아졌고 코가 뭉툭하다.

 

그런 와중에 일대 반전이 있었다. 서민의 지지를 등에 업은 만큼 그냥 밀려날 고무신이 아니었다. 반전은 1966년 일어났다. 이 반전으로 신발시장엔 활기가 넘쳤고 고무신은 기사회생했다. 지옥과 천당을 오간 고무업계는 서민의 신발 고무신 생산에도 전력하는 한편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과 기술제휴를 통해 고무신 다음 단계의 신발로 나아갔다.

‘100만 원짜리 하이힐 고무신!’ 반전의 주인공은 동양고무였다. 1963년 동구 초량에서 부산진구 당감동으로 이전한 동양고무가 회심작으로 1966년 내놓은 게 하이힐 고무신이었다. 여자 고무신의 굽을 힐처럼 높인 새로운 디자인이었다. 동양고무는 하이힐 고무신에 대한 자부심이랄지 애착이 대단했다. 서울 땅 한 평이 1만 원 하던 그때 100만 원을 현상금으로 내걸 정도였다.

일간지에 5단 통광고로 실렸던 힐 고무신의 특징다섯을 여기 옮긴다. 일제강점기부터 존재했던 고무신 디자이너.’ 그들이 있었기에 한국의 신발은 오늘 여기까지 왔다. 그들 또한 그 시대 숨은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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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gs1116@hanmail.m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