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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⑩ 선만고무와 일영고무
작성일 2021-12-09 조회수 876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⑩ 선만고무와 일영고무

2021-12-09 876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선만고무와 일영고무

 

부산 최초의 고무신공장은 어딜까?

 

한국 최초의 고무신공장은 대륙고무다. 19198월 서울에서 출범했다. 부산 최초의 고무신공장은 어딜까? 좀 애매하다. 학계 사람이 하는 이야기와 업계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다르다. 학계 사람은 고증을 통해 이야기하니 무시할 수 없고 업계 사람은 현장 경륜으로 이야기하니 무시할 수 없다.

우선, 학계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사실 학계도 주장이 두 갈래로 나뉜다. 부산발전원이 2004년 펴낸 <부산기업사>에는 19238월 설립한 일영(日榮)고무가 부산지역 신발기업의 효시라고 보고 산업연구원이 1993년 펴낸 <한국의 신발산업>에는 1922년 설립한 선만(鮮滿)고무를 최초로 본다.

업계는 선만고무로 본다. 1979년 나온 <국제상사 30년사> 706한국 고무화공업 발달사에 선만고무를 부산 첫 고무신공장으로 언급한다. 이 언급을 무시할 수 없는 게 <국제상사 30년사>가 나온 시점이다. 1979년이라면 1920년대 부산지역 고무신공장 출신이 꽤 생존해 있을 때였다. 그들이 기억으로 또는 자료에 기반을 두고 선만고무라고 콕 집어 말했다면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내 개인적으론 학계의 주장과 업계의 주장이 모두 맞는다고 본다. 시기적으론 1922년 설립한 선만고무가 앞설지 몰라도 선만고무는 본사가 서울에 있고 공장만 부산에 있었다. 반면 선만고무보다 한 해 늦은 19238월 설립한 일영고무는 부산사람이 부산에 설립한 토종 부산기업이었다. 그러므로 보는 관점에 따라서 부산 최초의 고무신공장은 선만고무가 될 수도 있고 일영고무가 될 수도 있다.

선만고무는 컸다. 조선과 만주를 아우른다는 상호가 말해 주듯 전국적 지명도를 가졌다. 설립은 1919년 했고 전국 각지에 마흔이 넘는 공장이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1922년 설립한 부산의 선만고무였다. 192077일 동아일보는 민영기 등 40인이 발기했고 자본금 불입 독려를 위해 남선(南鮮)지방으로 출장을 갔다고 보도한다. 1936년에는 평양에도 선만고무를 세운다.

선만고무는 신문사를 경영했다. 선만고무신보사 주최로 전조선고무업자대회를 경성상업회의소에서 열기도 했다. 선만고무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경성과 평양, 부산, 목포, 군산, 회령 등 방방곡곡 고무업자가 이 대회에 참가했다. 지명도가 높았던 만큼 황순원의 장편소설 <카인의 후예>에도 선만고무가 등장한다.

 

 

1930년 제작한 <대일본직업별명세도194호 부산부(釜山附)’ 지도의 뒷면 안내기(案內記)에 일영고무 전경 사진이 보인다부산의 다른 고무공장과 함께 박스 광고로 실렸다공장 건물 외벽에 日榮고무공장이란 상호가 선명하다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해방 두 번째인가 평양에 들렀을 때였다. 거지가 다 된 일본인 하나가 고깃간 주인에게 날기름 하나를 조르는 것이었다. 아쉽지 않게 먹어오던 고깃기름을 얼마간 먹지 못해 자꾸만 속에서 그걸 요구하는 모양이었다.그 정상이 가슴을 찌르는 것이었다. 훈이 선만고무공장 이름을 깜빡 잊어버린 것도 이 때문인지 몰랐다.

 

명목상의 첫 고무신공장 선만고무와는 달리 일영고무는 사실상의 부산 첫 고무신공장이었다. 19238월 부산 지주 김진수가 부산진역전 28번지에 세웠다. 1930년 제작한 부산부(釜山府지도의 뒷면 안내기(案內記)’에 주소와 전화번호, 공장 전경 사진이 나온다. 고무신의 역사에서 1920년대는 호시절이었다. 조선인 기호에 맞춘 디자인이 소비자의 구미를 당겼다. 당혜와 운혜를 본뜬 고무신은 부녀자의 주머니를 열게 했다. 가볍고 질기며 방수가 잘되고 더구나 가격이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았다. 서민의 신발 미투리가 25전 할 때 40전이었으니 고무신은 그야말로 신발시장 최강자였다.

일영고무 역시 호시절을 구가했다. 부산시가 운영하는 디지털 백과사전 부산역사문화대전에는 1930년 일영고무 규모가 나온다. 종업원 200명에 연간 고무신 생산량은 192,000족에 이르렀다. 그러나 끝이 좋지 않았다.

지난번 <신발 이바구>에 언급했던 삼화회(三和會)’ 10개 회사 멤버에 들었으나 1934년 삼화고무에 흡수·합병되고 만다. 부산진역전에 있던 일영고무의 현재 주소는 동구 좌천동 688번지. 거기는 어디쯤일까. 내비게이션을 작동하면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영고무 자리에 부산 최초의 고무신공장기념비라도 세우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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