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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⑤ 사상 신라고무
작성일 2021-09-13 조회수 1786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⑤ 사상 신라고무

2021-09-13 1786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사상 신라고무

 

()’표 신발로 한국 신발 이끌어


 
* 1954년 미군이 찍은 사상구 일대 사진가운데 보이는 물줄기가 낙동강이고 강 아래 공장 건물이 신라고무다.ⓒ부산시립박물관 소장

 

꽤 오래된 사진을 본다. 1954년 미군이 찍은 사상구 괘법동 일대 사진이다. 논인지 밭인지 널따란 초원을 가로질러 낙동강이 흐르고 강의 이쪽, 그러니까 사진 아래는 삼각형 지붕 공장이 여러 동 보인다. 공장 한쪽에는 굴뚝이 높다랗다. 한 시절, 사상지역 일자리 창출의 일등 공신이던 신라고무공업사 전경이다.

신라고무는 1947년 창업했다. 창업주는 박필희였다. 사상구 모라동 출신 박필희는 사상초등과 동명중, 그리고 1922년 동래고를 졸업했다. 신발산업의 미래가능성을 높게 보고서 동래고 후배 이상용과 함께 이북 원산에 고무신공장을 차렸다. 1937년 설립한 천광(天光)고무가 그것이다.

고향 놔두고 왜 이북으로 갔을까. 당시 부산은 고무신공장 포화상태였다. 그보다도 안하무인 설치는 일본인이 눈꼴셨다. 일본인 교장에게 툭하면 대들고 일제의 부당한 억압에 툭하면 대들던 동래고 출신다웠다. 마침내 광복이 되자 고향 사랑의 지극한 마음으로 사상면 괘법리 낙동강 강변에 신라고무를 세웠다.

사상은 왜 사상일까. 몰라도 그만이지만 알아둬서 손해 볼 일은 없다. 사상구 이전 지명은 사상면이었고 그 이전엔 사면(沙面)이라 했다. 강모래가 수북한 마을이었다. 조선시대는 부산의 중심이 동래였다. 동래를 중심에 두고 동면, 서면, 남면, 북면으로 나눴다.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 면도 있었다. 당감동 동평면, 낙동강 사면이 그랬다.

세월이 지나면서 마을 또한 커졌다. 인구가 늘고 집이 늘었다. 마을을 쪼개는 분면(分面)의 필요가 생겼다. 요즘으로 치면 분동(分洞)이었다. 1, 2동으로 나누는 대신 상하(上下)로 나누었다. 동면은 동상면과 동하면으로, 서면은 서상면, 서하면으로 분면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너무 커져서 상하가 아닌 상중하(上中下) 셋으로 나눠야 할 면이 생겼다. 거기가 사면이었다. 사상면, 사중면, 사하면으로 나누었다.

신라고무는 잘나갔다. 신라고무가 얼마나 잘나갔는지는 상표에서 짐작된다. 상표는 ()’이었다. 왕표 고무신과 운동화를 만들며 1950년대와 60년대 부산과 한국 신발산업을 견인했다. 가정사로 인해 1967년 폐업하고 이듬해 국제고무에 회사를 넘겨줄 때 부지가 자그마치 69천 평이었다. 20평이나 30평 정도는 몰라도 100평만 돼도 감이 안 잡히는 나 같은 소시민은 상상조차 안 되는 규모였다.

 

신라고무 창업주 박필희의 서울은행 발기인 참여를 보도한 동아일보 1959년 7월 27일 기사박필희는 두산그룹을 키운 선두기업인 동양맥주가 1952년 창업하자 거기에도 이사로 참여할 만큼 한국 상공계의 거두였다. ⓒ부산시립박물관 소장

 

그런 만큼 창업주 박필희는 상공계 거두였다. 부산은 물론 한국에서 알아줬다. 두산그룹을 키운 선두기업인 동양맥주가 피란지 부산에서 1952년 창업하자 이사로 참여했다. 두산그룹 창업주의 장남이자 두산그룹 초대회장 박두병이 피란시절 박필희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 광복 이후 최초의 민간은행 서울은행이 1959년 창립할 때도 발기인 겸 이사로 참여했다. 서울은행을 세운 개풍그룹 이정림 회장이 피란시절 집을 얻어 쓴 인연이 그렇게 이어졌다.

신라고무가 잘나가던 무렵 한국은 혼란기였다. 다르게 표현하면 한국이 위기였을 때 신라고무는 이를 기회로 이끌었다. 신발산업 전체가 그랬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신발산업이 있었기에 한국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나면서 한국은 총체적 위기를 맞았다. 거의 모든 분야가 위축됐다. 그 위기를 헤쳐나간 원동력이 신발산업이었고 신라고무를 비롯한 부산의 신발 기업이었다.

신라고무는 전쟁의 참화에서 불끈 일어섰다. 노동집약형 산업인 만큼 사상지역 극강의 고용을 창출했다. 몰려드는 피란민에게 일자리를 줬으며 피란민은 다시 폭발적으로 증대한 공급과 수요의 원동력이 됐다. 군화를 비롯한 훈련화 등의 군용 신발의 대량 생산은 다른 신발 기업과 마찬가지로 신라고무의 기반을 탄탄하게 했다. 군용 신발의 등장은 신발산업 전체의 파이를 키우는 기폭제였으며 고무신 일색의 신발을 다양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전쟁이 끝나고서도 위기는 기회였다. 전쟁특수를 바라보고 우후죽순 생겨난 군소 신발업체들은 전쟁이 끝나자 후유증을 앓았다. 재고 누적과 취약한 재무구조로 허덕였다. 산업 전체가 자칫 연쇄도산으로 이어질 우려가 컸다. 그러나 신발업계는 슬기롭게 대처했다. 신라고무 같은 중견기업을 중심으로 새 판을 짰다.

난립하던 군소업체가 정리되자 신발산업은 새 시대로 나아갔다. 1962년 첫 수출,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로 일본과 기술 제휴, 베트남전쟁 특수 등으로 신발산업은 승승장구했다. 1980년대 이후 세계 최강의 신발로 나아가는 도약의 디딤돌은 이렇게 놓였고 그러한 디딤돌의 하나가 사상에 있던 신라고무였다.


 

* 1960년대 국제고무 작업 광경신라고무 자리에 국제고무가 들어섰고 그 자리에 현재 도소매 쇼핑몰 르네시떼가 있다ⓒ부산시립박물관 소장 

 

나는 지금 육교에 있다. 낙동강 삼락생태공원과 도소매 쇼핑몰 르네시떼를 잇는 연륙교다. 신라고무 자리에 국제고무가 들어섰고 국제고무 자리에 르네시떼가 들어섰다. 부산진구와 동구는 고무신공장이 운집해 있던 곳. 신발 사업을 하려면 거기서 하는 게 여러모로 편했다. 그런데도 거기가 아닌 낙동강 강변에서 제2의 창업을 한 박필희 사장. 고향 사람에게 일자리를 나누고 고향에서 독자적으로 사업을 펼쳐 자수성가하겠다는 결기였다. 신라고무 창업주의 결기 같은 시퍼런 강바람이 연륙교 저 너머에서 불어댄다.

dgs1116@hanmail.net

 

 

동길산 부산에서 태어나 초중고와 대학을 부산에서 나왔다. 학교 졸업 후 첫 직장이 부산진구에 있던 신발 대기업 삼화고무였다. 1989년 무크지 <지평>으로 등단했으며 <꽃이 지면 꽃만 슬프랴> 등의 시집과 한국 신발 100년사 <고무신에서 나이키까지> 등의 책을 냈다. 2020년 김민부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