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人

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 ③고무신 상표
작성일 2021-07-29 조회수 1512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 ③고무신 상표

2021-07-29 1512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고무신 상표


  태화는 왜 말표? 

  동양은 왜 기차표? 


  동길산 시인


사진 설명


  ① 1966년 3월 21일 부산일보 게재 ‘100만 원 현상공모  동양고무 하이힐 고무신’ 광고. 당시 서울 땅 한 평이 1만 원 안팎이었다. Ⓒ부산일보


  ② 당감동 동양고무 정문 자리에 들어선 화승상가. 동양고무는 화승의 모태다. Ⓒ박정화



  ③ 1960년대 운행하던 전철에 부착한 태화고무 ‘말표 신발’ 광고 표지판. 동아대 부민캠퍼스에 전시했던 전차다. Ⓒ박정화 



  ④ 태화고무 자리에 들어선 태화현대아파트와 이 지역 자연마을 ‘마철리’가 유래인 ‘마철로’ 도로표지판.  Ⓒ박정화  


 말표를 모르고 기차표를 모르면 간첩이었다. 아니다. 간첩도 말표와 기차표라면 알았다. 말표와 기차표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무신 상표. 

1950년대와 1960년대, 좀 길게 잡으면 운동화에 서서히 밀리던 1970년대 초까지 신발 하면 고무신이었고 고무신 하면 말표였고 기차표였다.

 상표가 달랐던 만큼 제조사도 달랐다. 말표는 태화고무였고 기차표는 동양고무였다. 고무신은 만드는 족족 팔리는 당대 최고의 인기 품목이

었지만 경쟁은 심했다. 애플과 삼성이 경쟁하듯 했다. 굽을 구두처럼 높인다든지 코를 예쁘장하게 세운다든지 품질과 디자인에서 치열하게 

경쟁했다.

 1966년은 동양고무 기차표가 완승했다. 업계 최초일지도 모를 거액의 현상금 이벤트를 벌여 고무신 시장에서 치고 나갔다. 이벤트를 벌이면서

신문에 대대적으로 홍보한 광고 제목이 ‘현상 100만 원짜리 하이힐 고무신!’이었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뒷굽 높인 고무신을 출시하면서 내놓은

경품 총액이 100만 원이었다. 그때 서울 땅 한 평 값이 1만 원이었다. 고급스럽게 습자지로 포장해서 팔았기에 날개 돋쳐 훨훨 날아다녔다. 

 그런데 말표는 왜 말표일까. 기차표는 왜 기차표일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상표인데도 그 상표가 어떻게 해서 세상으로 나왔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내가 못 봤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지금까진 그렇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촌스러운 일이다. 지난 호에도 

언급했지만 그때도 호랭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었다. 

 말표와 기차표. 그냥 작명하진 않았을 것이다. 여러 후보를 가운데 두고 고르고 골라서 말표가 나왔고 기차표가 나왔을 것이다. 두 상표의

공통점은 있다. 말과 기차 둘 다 빠르고 튼튼하다. 그래서 그런가 생각하면 상표 해석으론 무난했지만 그게 다라고 하기엔 뭔가 허전한 면이

있다. 나는 그랬다. 오랫동안 허전했다. 

 말표에 대한 그 허전함은 도로 표지판을 보고서야 풀렸다. 태화고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아파트를 둘러보다가 전신주 높다랗게 내걸린 표지판

도로명에 시선이 멈추었다. 도로명은 ‘마철로’였다. 여기에 있던 자연마을 ‘마철리(馬鐵里)’에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마철리는 조선시대 말발굽을

끼워주던 동네였다. 태화 고무신이 왜 ‘말표’인지 그 비밀의 문이 한 꺼풀 열리는 순간이었다, 

 동양은 왜 기차표일까. 동양이 당감동으로 옮긴 건 1963년. 태화와 도로 하나를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그때는 그 일대가 높은 건물이라곤 없는 허허벌판이었고 가야역 부근의 기찻길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래서 기차표를 상표를 썼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닐것이다.

피란민의 애환이랄지 염원도 담겼다고 본다.  

 태화고무처럼 동양고무는 피란 기업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난 왔다. 부산에서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초량 오거리였다. 

육거리로도 불리는 곳으로 초량시장 뒤편 약간 고지대였다. 거기 있을 땐 기차표 대신 상호에서 딴 ‘동(東)표’를 고무신 상표로 내세웠다. 

1966년 하이힐 고무신 광고에는 ‘동표’와 ‘기차표’를 함께 썼고 이후 ‘기차표’로 굳어졌다.  

 말표와 기차표는 그냥 상표가 아니었다. 다 같이 없고 다 같이 어렵던 그 시절을 함께 견뎌 낸 동반자였다. 말이 그렇듯 기차가 그렇듯

역동의 상징이었으며 전쟁이 휩쓴 그 어렵던 시절을 딛고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는 신생의 의지였다. 가진 돈도 없고 가진 자원도 없이

오로지 맨몸 하나로, 오로지 근면과 성실 하나로 대한민국의 내일로 나아갔던 말표와 기차표! 그들이 지나갔던 길에 야생화 향기가 향긋하다. 

 야생화를 연상시키는 말표와 기차표는 지금 관점으로 본다면 촌스럽기 그지없는 상표다. 그런데도 한 시대를 풍미했단 것은 그 시대엔 그게

통했다는 의미다.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은 기억할 만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에 생생한 상표가 과연 몇이나 될까. 

당신은 어떤가. 50년 전에 나왔던 자가용의 상표를 몇이나 기억하는가. 애플과 삼성의 숱한 스마트폰 상표를 50년 후에 과연 기억할 것 같은가.

말표를 떠올리면, 기차표를 떠올리면 은근히 포근해지는 마음. 우리 세대가 행복한 이유 중의 하나다. 

dgs1116@hanmail.net 

 

  동길산   부산에서 태어나 초중고와 대학을 부산에서 나왔다. 학교 졸업 후 첫 직장이 부산진구에 있던 신발 대기업 삼화고무였다. 1989년 무크지 <지평>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여섯 권과 <고무신에서 나이키까지-부산진구 신발 이야기>, <100가지 서면 이야기>,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진구> 등의 책을 냈다. 현재 부산진구신문에 ‘부산진이야기’와 부산시보 다이내믹부산에 ‘부산 나들이’를 연재 중이다. 2020년 김민부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