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人

제목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② 초창기 고무신 광고전(戰)
작성일 2021-07-19 조회수 1099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② 초창기 고무신 광고전(戰)

2021-07-19 1099


동길산 시인의 ‘신발 이바구’  초창기 고무신 광고전(戰)

 

  그때의 고무신 광고는 

  지금의 스마트폰 광고

 

  동길산 시인

 

 

 

 

 

 

  사진 설명

 

  일제강점기 고무신 광고들. 위부터 대륙고무 광고, 서울고무 ‘거북선표’ 광고, 중앙상공 ‘별표’ 광고. TV를 켜면 스마트 폰 광고가 넘쳐나듯 일제강점기 그때는 신문을 펼치면 고무신 광고가 제일 좋은 목을 차지했다. 

 

 

 

  고무신은 최첨단이었다. 처음 나올 때는 그랬다. 요즘으로 치면 최신식 스마트 폰이었다. 한국 최초로 고무신공장이 세워진 때는 1919년. TV는커녕 라디오도 없던 그 시절, 신문의 최대 광고주는 신발이었다. TV를 켜면 휴대폰 광고가 넘쳐나듯 신문을 펼치면 고무신 광고가 제일 좋은 목을 차지했다. 

  한국 최초의 고무신공장은 대륙고무였다. 1919년 8월 서울에서 창립했다. 창업주는 외무대신 등을 지낸 이하영. 부산 기장 갯마을인 이을포 출신이었다. 일본인 여관 사환에서 시작해 고종 정부 대신까지 지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고위 관료사회에서 갯마을 출신인 것을 감추려고 본적 이을포를 이천으로 개명했다. 

  이하영은 언어에 조예가 깊었다. 어깨너머로 배운 일어, 선교사에게 배운 영어가 성공 신화로 이어졌다. 어찌어찌 고종 왕비의 눈에 뜨여 외교부 공무원으로 발탁됐고 이후 주미 외교관으로 부임했다. 갓 쓰고 미국 외교무대에서 왈츠를 춘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고종 정부가 반대하지 않았다면 미국 여자와 결혼한 최초의 한국인 공무원이 될 뻔도 했다. 이하영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 

  대륙고무의 창립은 만세운동 덕분이었다.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방방곡곡 번지자 일제는 형식적으로나마 강압통치를 풀고 유화정책을 펼쳤다. 한국 최초의 문예 동인지 <창조>도 그래서 나올 수 있었다. 민족자본에도 숨통을 틔워주었다. 조선인 회사 설립이 가능해졌고 이는 대륙고무 창업으로 이어졌다. 

  대륙고무는 한국 최초의 고무신 회사였지만 경쟁자가 없지는 않았다. 상대는 일제 고무신이었다. 대륙고무가 창립하기 이전부터 일본에서 들여온 고무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품질과 유통에서 대륙고무는 일제를 따라잡지 못했다. 위기였다. 신발끈 동여매기도 전에 도산할 판국이었다.

  이때 등장한 게 맞춤형 광고였다. 대륙고무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광고전략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다. 조선인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광고전(戰)을 펼쳤다. 말 그대로 광고를 통한 일제와의 한판 전쟁이었다.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 만든 물건을 사 쓰자’는 카피로 일제에 대한 반감을 건드렸다. 이로써 일제강점기 신발업계 최강자로 등극했다.  

  대륙고무의 성공은 동종 타사의 ‘줄줄이 창업’으로 이어졌다. 대륙고무부터 1925년에 이르는 기간 조선에 들어선 고무공장은 31곳이었다. 그중 20곳이 민족자본이 세운 조선인 회사였다. 이들은 대륙고무의 아성을 넘어야 했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었다. 대륙고무의 약점을 부단하게 파고들었고 이를 광고에 써먹었다. 

  대륙고무의 최대 약점은 친일이었다. 대한제국 외무대신과 법무대신 등을 지낸 이하영은 비록 을사오적엔 들지 않았지만 친일파 거두였다. 후발 주자들은 여기를 파고들었다. 서울고무는 이순신 장군이 연상되는 ‘거북선표’를 상표로 내세웠고 경성고무는 고종 둘째 아들 의친왕을 광고에 내세웠다. 고종이 그랬듯 의친왕 역시 일제와 대립각을 세웠으므로 국민적 호응이 대단했다. 

  대륙고무와 서울·경성고무가 티격태격하는 틈을 노린 광고도 있었다. 동아일보와 고려대를 세운 김성수가 창업한 중앙상공의 광고가 그랬다. 중앙상공 ‘별표’ 고무신 광고는 내구성을 강조했다. 질기지 않다는 평판이 지배적이던 대륙고무의 약점을 후벼 파는 광고였다. 광고 문구는 이랬다. 

 

  ‘강철은 부서질지언정 별표고무는 찢어지지 않는다. 고무신이 질기다 함은 별표고무를 말함이요 고무신의 모양 좋은 것도 별표고무가 표준이다.’ 

 

  그렇게 했는데도 ‘별표’ 고무신에 대한 반응은 별로였다. 선두주자 대륙고무의 벽이 그만큼 높았다. 별 수 없이 판촉에 직접 나섰다. 임직원이 고무신을 들고 나가서 ‘발로 팔기 운동’을 전개했다. 요즘의 소주 회사가 벌이는 식당 순회판촉 같은 이벤트를 1920년대 이미 펼쳤으니 대한민국 판촉 이벤트의 효시가 ‘별표’ 고무신이었다. 그때만 해도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이었다. 

  dgs1116@hanmail.net

 

 

 

  동길산   부산에서 태어나 초중고와 대학을 부산에서 나왔다. 학교 졸업 후 첫 직장이 부산진구에 있던 신발 대기업 삼화고무였다. 1989년 무크지 <지평>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여섯 권과 <고무신에서 나이키까지-부산진구 신발 이야기>, <100가지 서면 이야기>, <옛날 지도로 보는 부산진구> 등의 책을 냈다. 현재 부산진구신문에 ‘부산진이야기’와 부산시보 다이내믹부산에 ‘부산 나들이’를 연재 중이다. 2020년 김민부문학상을 받았다.